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쇠퇴해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고 이하윤(1906~1974) 선생이 밝힌 메모의 변(辯)이다. 교과서에 실린 덕택에 중년 세대에게 친숙한 ‘메모광(狂)’이라는 수필 속에서다. 그처럼 경탄할 만한 경지에 이른 고수는 많지 않겠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기록하는 동물이다. 이 선생의 설명대로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호모 스크립투스’(Homo Scriptus·기록하는 동물)로 불리는 이유다.

종이에 연필로 끄적이는 전통적 메모광은 감소일로지만, 온라인으로의 공간 이동을 통해 이뤄지는 기록의 총량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젊은 세대는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라 하더라도 온종일 쉼 없이 기록한다.

장삼이사들이 이럴진대 ‘꾼’들은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공개를 전제로 하진 않지만, 이들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빼곡히 기록한다. 반대급부를 요구하거나 일이 틀어지면 협박 도구로 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둠 속에서 나고 자란 뒤 소멸할 운명이었던 그 물건이 본의 아니게 빛을 보는 순간, 세상이 진동한다. 장부 소유주 이름들로 장식된 이른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건 세기의 전환기 무렵이었다.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성완종 등의 수식어로 장식된 리스트가 등장할 때마다 정관계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다만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상품(上品)이 있었는가 하면, 명절 선물 명단 수준에 불과한 것도 있었고, 시중 정보지 몇 개를 붙여 만든 듯한 종이 뭉치도 있었다. 여러 판본의 리스트가 동시에 등장해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의 리스트는 특이하게도 ‘50억 리스트’로 불린다. 여러 명에게 동일한 액수의 돈이 전달됐다는 게 이유다. 명명(命名)만큼은 그 분야의 신기원을 창조한 셈이다. 다만 이번 수사의 핵심은 이익 배분의 큰 그림을 그린 ‘몸통’을 찾는 작업이다. 리스트가 혹여 과거의 몇몇 사건에서처럼 초점을 흐리거나 수사팀의 핑곗거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면 과감히 뒷순위로 미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검찰에 ‘혜안’과 ‘의지’가 함께 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