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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같은 파국 막는 길 ‘위드 바이러스’에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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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호 22면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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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좀비 서사의 전염 경로는 뻔하다. 좀비에 물려 그 바이러스가 신체에 침투하면 인간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아이티 섬에서 부두교 제사장들이 고달픈 노예적 삶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노동력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존재다. 행동도 굼뜨고 판단도 느리지만 지시된 일만큼은 즉시로 해내는 맹종의 캐릭터다.

이후 문학·영화·게임 등에 나타나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더니, 2017년 영화화된 아이작 매리언(40)의 소설 『웜 바디스(Warm bodies)』에서는 급기야 감각과 감정을 지닌 모습으로 등장한다. 좀비가 되기 이전의 추억까지 떠올린다. 감염 위험도 거의 없어서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연대하기도 하는 등 공존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좀비를 격리하고 제거해 박멸시킨다는 서사가 공존의 서사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인간 대응보다 바이러스 변이 더 빨라

매일 업데이트 되는 코로나19 감염 현황을 접하면서 우리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이 생겼다. 확진 환자수나 사망자 수 뿐만 아니라 확진자 발생률과 거리두기 단계가 지역별로 표시되는 것에 어느덧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이제 이 통계로 백신 접종 상태나 거리두기 실천, 마스크 착용 유무 등과 연관시켜 모범 지역을 나누고 그 지역의 관광·유흥·음식·관습 등까지 망라해 문화적 차이로까지 확대 해석한다. 감염의 위협을 곧 지역과 사회 전반의 특성 차이와 연관시켜 바라본다. 신념, 취향, 금기와 위반, 혐오 등의 행태가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바이러스를 경계하는 본능을 지녔다. 벌레들이 출몰하는 지저분한 환경을 보거나 꼬리꼬리한 냄새를 맡으면 일단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동물 뿐 아니라 인간까지 전염시키는 사스·메르스·에볼라·코로나19 등 인수공통 감염 바이러스가 크게 유행하면서 동물에 대한 경계심까지 증폭되고 있다.

영화 ‘기생충’ 속 등장 인물들의 계급도. [중앙포토]

영화 ‘기생충’ 속 등장 인물들의 계급도. [중앙포토]

하지만 이런 우리 자세에 대해 바이러스는 어떤가. 바이러스는 증식할 생명체가 필요하기에 숙주의 몸에 침투하려고 다양한 변이를 거듭한다. 인간은 일단 자신의 피부·눈물·콧물·위산 등으로 바이러스를 막고, 면역 시스템을 가동시켜 바이러스의 침입을 최대한 차단한다. 이에 바이러스는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숙주의 면역 시스템을 피해가려고 한다. 바이러스와 숙주 간에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때 백신과 항바이러스제 등의 막강한 화력을 빌려 면역 시스템을 강화한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와 증식 숫자가 인간의 면역 시스템 강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계속된 변이와 보다 높아진 감염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침입하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일단의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기생체들이 숙주를 조종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쥐의 편도체에 기생하는 톡소플라즈마는 쥐의 뉴런을 교란시키고 성적 흥분 회로를 활성화시켜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 오히려 천적의 오줌에 흥분을 느끼게 만든다. 쥐가 저돌적으로 고양이에게 접근해 잡아먹히게 한 뒤, 이 기생체는 고양이를 숙주 삼아 번식에 성공한다.

개미에 기생하는 동충하초 균류도 마찬가지다. 개미로 하여금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잎 잎맥을 깨물고 꼼짝 없이 머물게 한다. 이 기생체는 숙주에게서 양분을 모조리 뽑아낸 뒤 빈 껍데기만 남게 하고는 가느다란 한 줄기 실을 개미 머리 밖으로 뻗는데, 이게 동충하초다. 이 균사체 줄기 끝에 포자 주머니를 매달았다가 땅바닥에 포자를 떨어뜨려 다른 개미들을 감염시킨다.

신경계조차 없는 단순 생명체에 불과한 바이러스가 톡소플라즈마나 동충하초 균류처럼 자신들보다 상위 생명체인 숙주들을 꼭두각시 취급하며 조종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든 못 하든 이들이 숙주를 조종한다는 사실은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새로운 치료법도 거론되고 있다. 기생체 차원의 일방적 통제가 아닌 숙주와의 상호작용, 즉 공존의 시각이 필요한 이유다.

태아가 발생하기 전에 모태에 태반이 형성된다. 태반의 면역세포 중에는 면역을 오히려 저하시키는 조절T 세포가 많이 있어서 모태와 절반이 다른 태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좀비와의 공존 서사를 다룬 영화 ‘웜바디스’ 포스터. [중앙포토]

좀비와의 공존 서사를 다룬 영화 ‘웜바디스’ 포스터. [중앙포토]

여기 관여하는 것이 숙주를 감염시켜 자신의 RNA를 숙주의 DNA에 삽입시키는 (레트로)바이러스다. 이렇게 유전자에 삽입된 바이러스가 인간 속에 포함되어 있고 더 나은 모습으로 인간을 진화하게 만들어 현재의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탄생할 때부터 이미 바이러스와 공존하며 오랜 세월 혜택을 입어 온 셈이다.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나중에 생긴 게 아니라 인간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바이러스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생명체의 출발 이전, 세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 기원을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생명체의 어떤 종도 바이러스를 피해가지 못한다.

최근 면역학적 치료법은 바이러스와의 공존 가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기생체와 숙주가 공존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침입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체를 공격하지 않고 외려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경우를 보자. 몸 전체에 있는 모든 세포가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내장 특정 장기의 세포가 파괴되기도 한다. 100여 가지에 이르는 이 질환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의 오남용을 통해 바이러스가 박멸되면서 면역계에 혼란이 발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면역학 전문가들은 숙주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이상한 반응이 기생체가 숙주 안에 없을 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서 기생체와 숙주 양자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 즉 바이러스를 무조건 박멸하기보다는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허용해 각자 생존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기생충을 이용해 크론병, 알레르기성 천식 등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려는 시도다. 특히 크론병의 치료제로 편충알 기법이 이미 2014년 이후 일부 병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내에서 일어나는 염증성 질환에 타인의 배설물에 있는 세균·바이러스·균류 등을 투입해 염증을 치료하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산업 역시 크게 부상하고 있다. 이 모두가 기생체와 숙주의 공존에 기반한다.

숙주·기생체 함께 살리는 치료법 개발

개미를 조종해 번식하는 동충하초 균류. [중앙포토]

개미를 조종해 번식하는 동충하초 균류. [중앙포토]

질병 예방을 위한 위생이라는 개념은 신경질적 차단과 제거·박멸이라는 개념을 양산했다. 그 결과 원인도 알 수 없고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자가면역질환이 증가했다. 위생이 박멸의 개념으로만 일방통행할 때 숙주들의 자기파괴적 공격이 거세진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자기파괴적 공격은 위생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는 것 같다. 그 예로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충(蟲)’으로 설명하려는 분위기를 들 수 있다. 평범한 젊은이와 성실한 직장인마저 자신이 하는 일에 접미사 ‘충’을 붙이곤 한다. 무기력하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자신들의 신세 한탄과 자학이 스며 있다. 한 술 더 떠 부모나 지인, 특권 계층에 달라붙어 양분을 뽑아먹고 있다는 ‘기생충’ 담론은 어쩌면 신경질적 위생 개념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 부부는 돈이 많았음에도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매너가 좋았다. 자녀를 사랑하고 부부간의 애정도 넘친다. 반면 고용된 기택 가족은 적의에 찬 눈으로 고용인을 대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경쟁 상태에 있는 지하실의 또 다른 자들을 제거하고 박멸하려고 한다. 숙주의 몸 안에 침입해 숙주를 조종하려는 기생충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박 사장이 기택에게서 풍기는 ‘지하철 냄새’에 조금 덜 민감했었다면, 높은 담벼락으로 아예 타자들을 차단시키려는 경계심만 없었다면, 기택은 자신이 기생충이라는 모멸감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이 기택에게 관용을 부여하고 신나는 음악과 음식으로 부족함 없는 근사한 파티에 초대하더라도, ‘병원성 바이러스’에 대한 박멸 개념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계급 투쟁의 희생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멸에서 공존으로 바뀐 좀비 서사처럼, 바이러스에 대한 자세도 바뀔 때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차단과 제거, 박멸의 대상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존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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