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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 통상질서 호전될 가능성 희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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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최근 국제무역과 관련한 몇 가지 흐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미·중 통상분쟁이 무역을 넘어 안보와 첨단기술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분쟁의 핵심은 국가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산업보조금이 과잉 생산 및 설비를 유발해 세계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불공정한 정부지원이 첨단기술 분야에 집중되고 있어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중국으로의 첨단기술제품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둘째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고조되고 코로나19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점이 드러나면서 주요국들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미래 첨단기술제품과 관련된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 경우 정부로부터 재정 및 세제상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만 다국적 기업의 입장에서는 과잉투자를 하거나 임금이 상승되는 등 비용측면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

신통상 이슈 다룰 다자규범 부재
WTO 각료회의 성과, 기대 낮아
CPTPP·디지털무역협정 중요해져
공급망 정비하고 탄소배출 줄여야

셋째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강화와 디지털무역의 확대다. 최근 유럽연합(EU)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을 발표하고 미국도 비슷한 제도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주요 선진국들은 양자 및 지역협정을 통해 디지털무역규범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국제무역 관련 흐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쟁점으로 부상하는 이슈를 관할하고 통제할 수 있는 투명하고 공정한 다자규범이 없다는 것이다.

두 달 후인 11월 말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되었던 세계무역기구(WTO)의 ‘제12차 각료회의(MC12)’가 제네바에서 개최된다. WTO는 ‘도하(Doha) 라운드’ 협상의 실패, 상소기구의 기능 정지, 신통상 이슈에 대한 대응 미흡 등으로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 취임한 사무총장이 주관하는 첫 번째 각료회의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는 코로나19 백신 관련 지적재산권협정 유보, 전자상거래, 투자원활화, 서비스 국내규제, 중소기업, 여성, 환경 등 새로운 통상이슈와 수산보조금, 농업, 산업보조금, 분쟁해결기구 등 기존에 논의되어 온 이슈들이 함께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전 상황을 보면 대부분의 의제에서 큰 틀의 공감대는 형성되었으나 세부사항에 들어가면 회원국 간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라진 것으로 알려진다.

시간상 MC12 개최 전까지 의미 있는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부 통상전문가들은 이번 각료회의에서 합의가 도출된다면 수산보조금이 유일할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그만큼 MC12의 성과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당분간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가 세계 통상질서를 개선하는데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초 다자무역체제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음에도 MC12 참여에 소극적이다. 반면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분야에서 동맹국과 함께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EU도 MC12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은 것 같으며 ‘탄소국경조정제도’와 디지털무역 관련 규범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다. 중국은 WTO 개혁과 MC12 의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한편 미국의 반도체 등 첨단기술제품의 수출규제가 세계시장 실패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첨단기술 분야에 정부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나아가 지난 9월 17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한 공식 신청서를 제출했다. 중국이 이러한 결정을 한 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과연 중국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보다 수준이 높은 CPTPP의 무역자유화와 국영기업, 디지털 무역, 노동, 환경 등과 관련된 규범과 기준을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불안한 세계통상 질서가 지속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다자무역체제의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정부는 MC12 준비과정과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동시에 지역무역체제와 복수국가협정 가입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히 CPTPP 가입신청은 물론(필자의 4월16일자 중앙시평 ‘CPTPP 가입신청, 빠를수록 좋다’ 참조) 주요국과 수준 높은 디지털무역협정을 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기업들도 지정학적 리스크, 디지털경제 가속화, 기후변화 대응강화, 제조업의 서비스화 등 여러 추세를 고려해 공급망을 정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앞으로 세계공장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 자회사를 둔 기업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부품 또는 최종제품 생산을 위한 해외투자 지역을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EU와 미국 등이 탄소국경조정세를 도입할 것에 대비해 탄소배출감소 노력을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첨단기술 분야에서 다양한 해외 협력 파트너를 확보해 고조되는 기술 보호주의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