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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형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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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장

김현예 P팀장

더러 백발이 성성한 이들이 모습을 비출 뿐, 빈소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1983년 1월 25일. 서울 광진구 군자동의 한 지하방. 주먹 세계의 ‘형님’으로 불렸던 이성순(1916~1983)의 마지막이었다. 해방 후 종로의 김두한, 동대문의 이정재와 함께 전설의 주먹으로 불렸던 그의 별칭은 시라소니. 신의주가 고향인 그가 17살 때 몰래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오가며 밀무역을 하다 얻은 별명이었다. 주특기는 박치기와 발길질. 너무 재빨라 “상대가 쓰러지는 것만 보일 뿐 시라소니가 치는 모습은 안 보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먹 ‘형님’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스러진 이후 ‘형님’이란 단어가 신문지면에 파괴력이 있는 열쇳말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님’ 전기환 씨의 일로 그는 경찰 인사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양녕대군’으로 불렸다. 1988년 5공 비리 수사 때 구속됐다.

‘형님’ 풍파는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부 때도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는 인사청탁 구설에 오르며 정치권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이권개입 혐의로 2008년 구속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 역시 뇌물 등의 혐의로 2012년 구속됐다. 이 전 대통령의 큰 형인 이상은씨는 자동차부품 회사인 ‘다스’ 회장을 지냈는데, 다스 차명 소유 논란이 일었다. 결국 이 일로 이 전 대통령은 다스 자금 횡령과 뇌물 혐의로 2018년 구속돼 지금껏 형을 살고 있다.

잠잠하던 형님 폭풍이 다시 몰아치고 있다. 이번엔 혈연지간이 아닌 ‘아는 형님’이 주인공이다.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개발로 수천억원의 일확천금 배당을 받아 특혜 의혹이 일고 있다. 박영수 전 특별검사, 권순일 전 대법관,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 굴비처럼 유력자 이름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 조사에 출두한 화천대유 최대주주인 김만배씨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형님들을 법률단으로 모셨다.”

형님 난타전마저 인다.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화천대유 김씨가 윤석열과 형, 동생하는 사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 전 검찰총장 부친 소유 주택을 김씨의 누나가 샀다는 보도가 난 직후였다. 형님이든 아는 형님이든 좋아하는 형님이든, 권세가들의 형님 관계나 연루자들의 당적보다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의혹 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