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주민이 손수 지은 기차역, 영화 ‘기적’ 실제 모델 봉화 양원역

중앙일보

입력 2021.09.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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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적'의 한 장면. 박정민과 임윤아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강원도 정선 임계면 낙천리의 한 둑방 길에서 촬영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기적'의 한 장면. 박정민과 임윤아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강원도 정선 임계면 낙천리의 한 둑방 길에서 촬영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찻길도 없고, 기차도 서지 않는 두메산골의 작은 기적. 간이역 만들기에 목숨 건 시골 소년의 성장기. 위태로운 철로 위에서 기적을 만들어 가는 휴먼드라마…. 15일 개봉한 ‘기적’의 한 줄 요약은 대개 이런 식이다. 이장훈 감독의 영화 ‘기적’은 국내에서 제일 작은 기차역이자 한국 최초의 민자 역사로 알려진 경북 봉화의 ‘양원역’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공간이 곧 주인공이자,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영화를 본 관객 입장에서는 실제 양원역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허구 반 실화 반

기찻길을 따라 이동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철도 터널 앞에 신호등을 세우는 장면은 정선 레일바이크에서 촬영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찻길을 따라 이동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철도 터널 앞에 신호등을 세우는 장면은 정선 레일바이크에서 촬영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마을에 간이역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 준경(박정민)과 단짝 라희(임윤아). 이 둘의 에피소드는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나, 기차역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

양원역과 승부역 사이에는 지금도 찻길이 없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철길이 유일한 통로. 1988년 양원역이 생기기 전까지, 주민은 철길을 몇시간씩 걸어 읍내로 나갔다. 사진 카카오맵 캡처

양원역과 승부역 사이에는 지금도 찻길이 없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철길이 유일한 통로. 1988년 양원역이 생기기 전까지, 주민은 철길을 몇시간씩 걸어 읍내로 나갔다. 사진 카카오맵 캡처

영화의 배경이 된 양원역 일대, 그러니까 경복 봉화군 소천면 분천2리(옛 원곡리)는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장소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친 골짜기 깊숙한 곳에 마을이 틀어박혀 있어서다. 1955년 영암선(영주~철암, 63년 영동선으로 통합)이 개통하며 일찍이 마을을 관통하는 기찻길이 놓였지만, 정작 기차역이 없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철로를 따라 승부역까지 대략 3.7㎞ 길을 걸어 기차에 올랐다. 읍내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유일한 통로였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처럼 컴컴한 터널 안, 좁다란 교각 위를 건너가 기차를 타고 학교도 다니고 장도 봤다.

분천2리 김태정(69) 이장은 “터널에서 기차를 만나면 몸을 바짝 벽에 밀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사고가 종종 일어났지만, 마땅히 돌아갈 길도 없었다. 오죽하면 직접 간이역을 만들었겠나”라고 회상했다. 그 시절 장에 나갔던 어르신들은 마을을 지날 때 기차 밖으로 짐을 던져두었다가, 다시 그 먼 길을 되돌아와 짐을 거두어 갔단다. 양원역이 생긴 건 1988년 4월의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손수 곡괭이로 돌을 고르고, 벽돌을 올려 세 평 남짓한 간이역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 민자 역사의 탄생 스토리다.

거기에 양원역은 없었다

경북 봉화군 분천리에 있는 실제 양원역(사진 위). 2009년 8월 촬영한 모습이다. 영화 제작진은 정선 여량면에 양원역과 철로 등을 그대로 재현해 촬영했다. 사진 코레일, 롯데엔터테인먼트

경북 봉화군 분천리에 있는 실제 양원역(사진 위). 2009년 8월 촬영한 모습이다. 영화 제작진은 정선 여량면에 양원역과 철로 등을 그대로 재현해 촬영했다. 사진 코레일,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적’에 등장하는 양원역은 진짜 양원역이 아니다. 승부역이나 마을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이정주 제작실장은 “제작 초반에는 봉화에서 촬영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양원역 일대는 수많은 장비와 스태프가 드나들기에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못했다”고 말한다. 기찻길은 있지만 기차역은 없는 마을이라는 설정 때문에 영화를 시작했지만, 정작 그 험한 환경 때문에 화면에 담지 못한 셈이다. 승부역과 양원역 사이에는 여태 도로가 없다. 기찻길로는 3.7㎞ 거리지만, 찻길로는 약 53km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이장훈 감독을 비롯해 촬영‧미술감독 등 주요 스태프가 촬영 전 함께 마을을 찾았다. 이 감독은 “영화 속 준경처럼 승부역부터 양원역, 분천역까지 쭉 걸어봤다. 사전 답사 차원이었지만, 오지 여행 같기도 했다. 이때의 체험을 토대로 로케이션과 미술 작업을 이어갔다”고 전했다.

양원역에서 승부역 가는 길은 굽이굽이 협곡길이다. 왼쪽 사진은 승부역 인근의 승부교의 모습. 오른쪽은 원주 레일파크에서 촬영한 '기적'의 한 장면이다. 사진 중앙포토, 롯데엔터테인먼트

양원역에서 승부역 가는 길은 굽이굽이 협곡길이다. 왼쪽 사진은 승부역 인근의 승부교의 모습. 오른쪽은 원주 레일파크에서 촬영한 '기적'의 한 장면이다. 사진 중앙포토, 롯데엔터테인먼트

양원역은 강원도 정선 여량면 유천리에 실물 크기 그대로 복원해 촬영했다. 마을 사람이 기차를 피해 오가던 철로와 터널의 모습 등은 대부분 정선 레일바이크에서 촬영했다. 준경과 라희가 자전거를 타고 기암절벽 아래 시골길을 지나는 장면은 정선 임계면 낙천리의 풍경이다. 협곡과 다리, 기차가 어우러진 모습은 강원도 원주 레일파크(간현유원지)에서 담았다. 그러니까 영화 속 강물은 봉화의 낙동강이 아니라, 원주의 섬강이다.

영화 속 승부역의 외관은 삼척 도경리역을 꾸며 촬영한 것이다. 도경리역은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으로 유명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승부역의 외관은 삼척 도경리역을 꾸며 촬영한 것이다. 도경리역은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으로 유명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승부역의 외관은 강원도 삼척 도경리역의 모습이다. 도경리역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 5월 지어진 1층 목조건물로, 영동선(영주~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이다. 열차 내부 모습은 경기도 의왕 철도박물관에 보존된 옛 협궤열차 내부에서 촬영했다. 국내에서 1965년에 제작해 실제 수인선(수원~인천)을 달리던 열차로, 일반 여객열차와 달리 승객이 마주 보고 앉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협곡을 걷다

낙동강 세평 하늘길은 철로와 나란히 조성돼 있어 달리는 기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중앙포토

낙동강 세평 하늘길은 철로와 나란히 조성돼 있어 달리는 기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중앙포토

멀고 험하지만 여행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양원역에는 지금도 기차가 오간다.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4회 이곳을 지난다. 분천~양원~승부~철암을 느릿느릿 오가는 관광열차도 있다. 바로 ‘백두대간협곡열차(V트레인)’인데, 현재는 운행을 멈춘 상태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2월 26일부터 운행을 잠정 중단했다. 관광열차가 멈추면서 분천리를 찾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양원역 옆 간이 장터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농산물을 팔던 어르신들의 모습도 이제는 사라졌다.

걷기여행도 가능하다. 분천역에서 시작해 양원역을 거처 승부역에 이르는 12.1㎞ 길이의 트레킹 코스(낙동강 세평하늘길)가 있다. 철로 옆 샛길을 따라 걸으며 그 시절 어르신의 고단한 삶을 몸소 체험하는 길이다. 협곡의 절경이 내내 따라다닌다. 중간중간 산 비탈을 만나지만, 3~4시간이면 다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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