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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내면의 가을 필요한가, 예수가 전해준 ‘잎새의 신학’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백성호의 예수뎐]  

갈릴리 호수 뒤편의 산으로 올라갔다. 왕복 2차로의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다. 올라갈수록 산촌 풍경이 펼쳐졌다. 울창한 나무들과 오래된 오솔길, 비탈진 언덕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갈릴리 호숫가는 어촌이지만, 주변의 산에는 산촌 마을들이 있다. 예수는 이 산을 오가며 메시지를 전했다.

갈릴리 호숫가는 어촌이지만, 주변의 산에는 산촌 마을들이 있다. 예수는 이 산을 오가며 메시지를 전했다.

저 아래 갈릴리 호수가 아득하게 보였다. 당시 예수는 갈릴리 호수의 북쪽 마을인 가버나움에 주로 머물렀다. 거기서 산길을 타고 여기저기 산촌 마을을 다니며 가르침을 펼쳤다. 그곳에는 2000년 전 예수 당대의 마을 유적도 있었다.

(19) 인간에게 왜 내면의 가을이 필요한가

인간의 삶은 ‘오십보백보’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에 집착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삶. 그게 적지 않은 사람의 인생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걱정하지 마라”라고 했다. “Don’t worry, be happy(걱정하지 마, 행복할 거야)” 처럼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의 “걱정하지 마라”에는 인간의 존재 원리에 대한 깊은 시선이 녹아 있다.

이 산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마태복음 6장 25절)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예수는 저 새들을 보라고 했다.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줄지어 날아갔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예수는 저 새들을 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따진다. “무슨 옷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예수의 눈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뿌리’다. 예수는 우리에게 뿌리를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음식을 먹고, 무엇을 위해 옷을 입는가. 그걸 묻는다. 예수는 목숨과 몸이 주인공이지, 음식과 옷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를 예로 들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장 26절)

아름드리나무 아래 누웠다. 잎들이 하늘을 덮었다. 나무 속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다. 삐오옥, 삐오오옥. 궁금했다. ‘우리는 왜 내일을 걱정할까. 새들에게는 왜 걱정이 없을까. 예수는 왜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우리는 한장의 잎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떨어져야 한다. 그게 인간이 갖는 삶의 유한성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말이다. 잎이 떨어지면 나의 삶도 떨어진다.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그래서 걱정한다. 내일은 뭘 먹을까, 모레는 뭘 입을까. 그다음 날은 또 뭘 마실까. 걱정은 끝이 없다.

인간의 육신은 시간이 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한하다. 우리에게 내면의 가을이 필요한 본질적 이유다.

인간의 육신은 시간이 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유한하다. 우리에게 내면의 가을이 필요한 본질적 이유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복음 6장 28~30절)

예수의 눈과 우리의 눈. 그사이에는 큼직한 강이 흐른다. 예수의 눈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들에 핀 나리꽃도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박한다. “사는 게 장난입니까? 걱정을 해도 살기가 빠듯한데, 어떻게 걱정 없이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깊은 눈으로 말한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울라나젤랄렛딘루미(1207~1273)는 이슬람의 영성가다. 수피교 교단의 창시자이자 시인이다. 유네스코는 2007년을 ‘루미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의 시에는 영성의 눈이 담겨 있다. 루미는 이렇게 노래했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래야 예수가 다시 숨을 쉬시니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자라는 게 별로 없으니
평평해지게나 부서지게나
그러면 그대로부터 들꽃들이 피어날 테니
―루미의 시 「내면에는 가을이 필요하다네」 중에서

루미는 시인이자 영성가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종교를 막론하고 추모객들이 모였었다.

루미는 시인이자 영성가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종교를 막론하고 추모객들이 모였었다.

루미의 시는 죽어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가을이 두렵다. 겨울이 두렵다. 낙엽이 되는 것이 두렵다. 그런 우리에게 루미는 말한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렇게 ‘영성의 팁’을 일러준다. 심지어 “그래야 예수가 숨을 쉰다”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를 말한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음도 인정한다. 다만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선지자로 여길 뿐 메시아로 보진 않는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역시 한 사람의 선지자로 본다. 이슬람교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자식을 지상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점에서 기독교와 다르다.

루미가 말한 예수는 ‘내 안의 예수’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내면의 그리스도다. 그 예수는 잠들어 있다. 그래서 다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죽어감이 필요하다. 울퉁불퉁한 바위 같은 에고가 가을과 함께 무너질 때 비로소 내면의 예수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바오로)은 그런 가을을 체험하고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라고 고백했다. 거기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그러한 예수의 부활을 위해 우리에게는 내면의 가을이 필요하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내면의 가을은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내면의 가을은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바위에서는 그 무엇도 자랄 수가 없다. 그래서 바위를 부수어야 한다. 루미는 그걸 ‘죽어감’이라고 불렀다. 예수가 말한 ‘자기 십자가’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0장 38~39절)

잎새의 눈은 좁다. 자신의 진정한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그저 바람에 팔락이는 잎새가 자기 자신의 전부라고 여긴다. 잎새는 자신과 연결된 나뭇가지를 보지 못한다. 그 가지가 이어진 몸통도 보지 못한다. 그 몸통을 떠받치는 뿌리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잎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모른다. 자신의 주인공이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임을 모른다. 그래서 걱정한다. 폭우가 내릴까 봐, 돌풍이 불까 봐, 가을이 올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데 ‘죽어감’을 아는 잎새는 다르다. 내면의 가을을 체험하는 잎새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을 안다. 자기가 하나의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임을 안다. 그때는 가을이 두렵지 않다. 낙엽도 두렵지 않다. 마지막 잎새가 되는 운명을 걱정하지 않는다. 왜일까. 잎이 다 떨어져도 나무는 남기 때문이다. 잎이 다 떨어져도 바탕은 남기 때문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나무는 그대로 서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들에 핀 꽃들을 보라고 했다.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않는 들꽃들을 보라고 했다.

예수는 들에 핀 꽃들을 보라고 했다.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않는 들꽃들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는 “나리꽃을 보라”라고 했다. 들꽃처럼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슨 음식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한장의 잎새가 떨어져도, 나무는 그대로 서 있기에 말이다. 파도가 사라져도 바다는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져도 신의 속성,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짧은 생각

루미는 약 8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시인이지만,
그의 글에는 존재의 바닥을 타고 내려가는
영성의 울림이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2007년을 ‘루미의 해’로 정한 바 있습니다.
비단 무슬림 뿐만 아닙니다.
가톨릭의 수도자도,
영성이 있는 개신교 목사도,
세계의 명상가들도,
다들 루미의 시를 읽고 묵상합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영성 수도 공동체로 분류되는 수피즘을 창시한 인물이 루미다.

이슬람 안에서도 영성 수도 공동체로 분류되는 수피즘을 창시한 인물이 루미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종교의 벽, 인종의 벽, 민족의 벽을
뛰어넘는 ‘깊은 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눈은 마치 두레박 같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 있는 우물 속으로
두레박 하나가 ‘첨벙!’하고 떨어집니다.

눈을 감고서
묵상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합니다.

눈을 떠보면
길어올린 두레박이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작지 않은 깨달음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예수뎐’을 말하면서
왜 이슬람 시인을 꺼내느냐고
불편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루미의 시를 통해
예수를 더 깊이 만나게 됐다는
다른 종교의 수도자와 영성가를 저는 여럿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 위를 한 마리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다. 예수는 저 새처럼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갈릴리 호수 위를 한 마리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다. 예수는 저 새처럼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루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종교와 상관 없이 추모객들이 모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인, 유대교인, 이슬람교인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루미는 죽음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땅 밑의 묘비를 찾지 말라.
 사랑하는 가슴들 안에서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 건,
그의 종교나 민족, 나라 때문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눈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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