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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기의 소통카페

민주주의 수준 대변하는 ‘언론재갈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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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언론탄압을 목격한 그해 겨울은 충격적이었다. 기업을 옥죄어 광고란이 백지인 채로 발행되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를 통해 오만한 독재 권력의 민낯을 본 것이다. 권력이 언론과 언론인을 혼내기도 한다는 글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분노한 국민은 신문사에 성금을 보내고 격려 광고를 실었다.

그때 그 신문에서 오려 놓은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S대 23회 동기15인 일동)’라는 격려 광고는 아직도 액자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성금의 답례로 받은 족자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일천구백칠십오년 이월, 주최: 목실회, 후원: 월간 씨알의 소리사)’라고 적혀 있었다. 국민과 언론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데, 정부 권력은 모르쇠로 방관했다. 결국 ‘진짜 언론’을 실행하려는 기자들이 해직되고, 광고는 다시 실리게 되고, 권력은 천 년을 갈 것처럼 안녕한 표정을 지었다.

1970·80년대 언론탄압 실패
소통과 관용의 민주주의와 위배
절대국가나 생각할 시대착오법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1980년 눈이 부시게 푸르던 어느 날에 절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언론사 살생부가 작성됐고, 자신이 신참 PD로 인생을 불태우려던 방송사는 없어질 거라고 했다. 대명천지에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것 같았지만 ‘정의 사회 구현’과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폐합됐다. 난폭한 권력과 관변 어용 지식인들의 입맛에 따라 언론사는 생사가 결정되고, 언론인들은 퇴출당했다.

소통카페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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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야단법석을 떤 백지 광고와 강제통폐합의 망령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5년과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건강한 민주주의와 민주적 공동체의 지킴이인 언론에 대한 억압은 잠시 성공하는 듯해도 결국은 실패하고야 만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의사소통의 관용’(『말과 권력』, 이준웅)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관용을 통해 누구이건, 어떤 의도이든, 결과에 대해 짐작이 되건 말건, 의견을 말하게 하고 비교하고 검토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견 교환과 비판을 통해 불가피한 갈등적 조건에서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언론자유의 공간과 비례하는 것이다.

여당 대표는 언론중재법을 반대하는 야당에 대해 “야당만 할 것인가”라고 비난했다. 또한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되는 가를 기준으로 이 법의 처리를 판단하겠다”라고도 했다. 새 언론법을 밀어붙이는 의도가 권력이나 정부 여당과 국정 운영에 유리한 언론환경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언론이 기존의 권력이나 체제에 종속되고 국가의 정책이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절대군주제 시대에서 통용되던 권위주의 철학(『언론의 4이론』, 시버트·패터슨·슈람)과 다르지 않다. 군주와 귀족 등 소수의 특권층이 일반인들을 비합리적·비이성적인 존재로 보고 지도편달을 받아야 하는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현대에서는 시대착오적인 독재국가에서나 그럴싸한 명칭을 단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언론관이다.

언론중재법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권력을 감시하고 부정과 불의를 비판하는 언론의 고유한 역할을 유명무실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모든 언론단체는 물론이고 정부와 여당의 정책을 옹호해온 유력 단체도 반대한다. 대한민국의 정치나 진영집단과는 전혀 무관한 유엔의 ‘인권 최고사무소’를 비롯하여 오랜 전통의 국제 언론단체들도 한결같이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이 갖는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될 수 있다’는 비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민주적 공동체에 필요한 언론법은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자유로운 경쟁 및 편집권의 독립이 보장되는 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젊은 생명을 물고문으로 죽이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사망했다’는 천인공노할 권력의 거짓말을 집요하게 취재하여 세상에 알린 언론의 역할은 어떤 이유로든 위축받아서는 안 된다. 이제 언론중재법은 여당과 야당만의 협의 차원을 넘어섰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로 국내외가 주목하는 상황임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