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고궁에 상상 속 정원이 열렸다. 덕수궁 즉조당 앞마당에는 몸보다 큰 뿔을 가진 사슴이, 석어당 대청마루에는 붉은 오얏꽃 나무가 자리했다. 행각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에는 나무, 숲, 새소리가 가득 찼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몽환적 빛줄기를 받으며 앉아있자니 실제 고궁과 상상을 구현한 정원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가 주최하는 '덕수궁 프로젝트 2021:상상의 정원' 전이 서울 덕수궁 야외에서 오는 11월 28일까지 펼쳐진다. 지난 2012년 시작해 올해 네 번째를 맞은 이번 전시에는 현대 미술가 권혜원·김명범·윤석남·이예승·지니서, 조경가 김아연·성종상, 애니메이터 이용배, 식물세밀화가 신혜우, 국가무형문화재 채화장 황수로가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의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고 오늘날의 정원에 가치에 대해 재해석한 작품 10여점이 전시된다.
전시 프로젝트의 제목인 '상상의 정원'은 조선 후기 '의원(意園)' 문화에서 차용했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글과 그림을 통해 경제적 제약 없이 마음껏 풍류를 즐기는 ‘상상 속 정원’을 누렸다. 담의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한국의 전통정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기에 최적화되어있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당시 문인들이 가졌던 정원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상상력이 더해진 정원을 만들어냈다.
작가 로버트 포그 헤리슨은 저서 '정원을 말하다'에서 "정원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는 곳이다... 그 시간이 개인적이든, 역사적이든, 지리학적이든 간에 말이다. 과거의 모든 차원은 신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여기 한 뼘의 땅에 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작품 설명 순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마치 전통정원을 산책하듯 덕수궁을 느긋하게 거닐며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작품에 각자의 상상을 더해보는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