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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프로 여당, 아마추어 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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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은 ″출처와 작성자가 없는 괴문서로 국민들을 혼동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은 ″출처와 작성자가 없는 괴문서로 국민들을 혼동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국회사진기자단]

신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황금사과를 던졌다. "가장 아름다운 자의 것"이라는 말과 함께. 제우스의 아내 헤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다퉜다. 세 여신의 싸움은 결국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고발 사주'에 대처하는 국민의힘 # 당사자는 미숙, 경쟁 캠프는 즐겨 # 당 전체 위기에 너무 안이한 대응

'윤석열 고발 사주' 의혹이 국민의힘에 '불화의 황금사과'가 됐다. 당사자인 윤석열 캠프의 대응은 서툴고, 다른 캠프는 반사이익 챙기기에 급급하다. 당은 중심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야당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실력으로 정권 교체 목표에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드라마 중 백미를 꼽으라면 1990년 벌어진 민자당의 '내각제 각서 파동'이다. 노태우·김영삼(YS)·김종필(JP) 3명이 합당 과정에서 작성한 내각제 이행 각서가 그해 10월 중앙일보 특종 보도로 존재를 드러냈다. 내각제엔 손톱만큼도 관심 없이 차기 대권 꿈을 꾸던 YS에겐 악재였다. YS의 뒤집기 기술은 '공작 정치' 주장이었다. 각서 내용은 싹 무시하고 유출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당무 거부와 '마산 농성' 끝에 결국 당권 장악이라는 반전을 이뤄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나아가 국민의힘은 그때처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고발 사주 의혹은 내각제 각서 파동과 성격이 다르다. 각서 유출 사건은 계파 간 알력의 소산이었지만, 고발 사주 의혹은 당 전체의 존재 기반과 관련된 위기다. 바닥을 헤매던 보수 야당의 지지율은 상당 부분 여권의 무리한 검찰 개혁 반작용으로 되살아났다. 검찰 권력 사유화를 통한 국기 문란이라는 여권의 주장이 먹혀들면 야당의 지지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적 여건은 더욱 차이 난다. 각서 파문 당시 민자당엔 YS에 필적할 만한 차기 주자가 없었다. 공작 정치 주장은 어찌 보면 JP 표현대로 '틀물레질'(무턱대고 떼를 쓰는 짓)이었지만, 당내 역학 구조를 읽은 YS의 노련한 승부수였다. 윤 전 총장에게 YS 같은 노련함이나 당내 입지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에서 윤 전 총장은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발언은 격정적이었으나 음모임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정제되지 못한 발언 과정에서 '비(非) 메이저 언론'을 섭섭하게 만드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당 지도부의 대응도 안이하기 짝이 없다. 김웅 의원과 윤 전 총장의 형식적 해명만 듣고 사실상 당 차원의 대응에 손을 놓아 버렸다.

더 한심한 것은 상황을 즐기는 듯한 경쟁자의 모습이다. 홍준표 의원은 윤 전 총장의 기자회견을 두고 "검찰총장 버릇이 나왔다. 네거티브 대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고 훈수를 뒀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은 딱 이럴 때 쓴다. 홍 의원은 상황 초기에 윤 전 총장에 대해 "공작 정치 운운하지 말고 겸허하게 대국민 고백을 하라"고 압박했다.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보수 전체가 위기감을 가져야 할 사안인데도 지지율 역전 기회로만 여기는 듯한 모습은 당의 '적장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답지 않다.

야당의 혼란은 뚜렷한 철학 없이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잉태된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여권은 일사불란하다. 병풍·BBK 등을 선거 전략으로 경험해본 정당답다. 좌장 이해찬 전 대표까지 "총선 때 3가지 공작 제보를 받았다"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선거 중립을 지켜야 할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대놓고 윤 전 총장과 손준성 검사의 유착을 기정사실로 했다. 심지어 검찰은 통상 60일쯤 걸린다는 공익신고 인정 절차를 며칠 만에 뚝딱 처리했다.

사태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길어지는 논란은 여권엔 꽃놀이패가 될 공산이 크다. 이런 판에 보수 야당의 지도부는 헤매고, 각 캠프는 이해타산에 골몰한다. 자꾸만 지난해 4·15 총선의 저녁이 생각난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