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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백인은 ‘백인에 희생된 흑인’ 그릴 자격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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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데이나 셧츠의 그림 ‘열린 관’이 201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된 모습. [AP=연합뉴스]

데이나 셧츠의 그림 ‘열린 관’이 2017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된 모습. [AP=연합뉴스]

“유기견을 키운다는 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 전문가들은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사람들한테 유기견을 절대 추천 안 해. 왜냐면 유기견들이 한번 상처를 받았어가지고 사람한테 적응되는 데 너무 오래 걸리면 강아지 모르는 사람이, 사람도 상처받고 강아지도 또 상처받고.”

아이돌 출신 인기 연예인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다. 처음에는 이게 왜 논란이 되나 싶었다. 유기견 키우는 일이 그만큼 더 신중함과 각오가 필요한 일이고 그래서 키우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찬사의 말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하지만 “유기견도 성격과 건강상태가 각기 다른데, 뭉뚱그려 키우기 어렵다는 편견을 심는 말이다” “어차피 초보에게는 어떤 반려견이든 쉽지 않은 법인데, 유명인이 ‘유기견을 절대 추천 안 한다’고 해서 기피하게 하면, 더 많은 유기견이 반려를 못 찾아 죽음에 처할 수 있다”라는 동물보호단체들의 반박 성명이 나오자 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 이용했다, 작품 치워라” 비판
작가의 의도 오해하는 경우 많아

연예인 유기견 발언 논란도 비슷
SNS 발달로 창작·수용 충돌 늘어

메신저보다 메시지에 주목하고
삭제·사과 요구보다 토론 벌여야

만약 그 연예인이 “그 부분은 미처 생각 못 했다”고 수긍하거나, “나는 여전히 초보의 유기견 입양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기견 입양의 대안이 펫숍인 것만도 아니고 일반 가정분양도 있다”라고 차분하게 반박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논란은 건설적인 토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논란 초기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여과 없이 나온 비난에 마음이 상한 것인지, 그 연예인은 분노를 터뜨렸고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이 모든 논란은 그곳 유저들이 삐딱한 해석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물보호단체들의 성명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지목한 여초 커뮤니티가 요즘 남초·여초 커뮤를 중심으로 격렬해지는 젠더 갈등과 얽혀 있어,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동물권 문제가 엉뚱하게 젠더 갈등 이슈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 한국을 비롯해 소셜미디어를 통한 발언과 비판이 활발한 나라에서는,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는 이슈가 감정싸움이 되고 사회적 피로감이 쌓이는 일이 많다. 지금 문제의 연예인과 커뮤니티 이름을 굳이 쓰지 않는 것은,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이며, 또한 이런 갈등이 발언자에 대한 편견과 인신공격으로 악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기견 발언 논란처럼 선의로 한 말도 정치적 올바름의 부족으로 비난받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그와 비례해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미술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휘트니 비엔날레의 ‘열린 관’ 사건

대표적으로,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매기 넬슨이 최근에 출간한 책 『자유에 대하여(On Freedom)』에서 다룬 ‘열린 관(Open Casket)’ 그림 사건이 있다. 유대계 백인 여성 화가가 2017년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한 것인데, 1955년 백인들에게 잔혹하게 린치·살해당하고, 시신마저 강물에 유기된 흑인 청소년 에멧 틸의 주검을 반추상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그 당시 소년의 어머니 매미 틸은 이 만행을 널리 고발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어서 아들 시신의 처참한 얼굴을 공개한 채로 장례를 치렀다. 화가는 2016년 여름 흑인 남성들이 잇달아 경찰의 총에 사망한 사건을 보고 에멧 틸의 비극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다. 그림에는 관에 누운 에멧 틸의 뭉개진 얼굴이 거의 추상적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비엔날레 개막 날, 젊은 흑인 남성 미술가가 ‘열린 관’은 흑인의 끔찍한 죽음을 볼거리로 만들고 흑인들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며 ‘Black Death Spectacle’ 문구가 적힌 셔츠를 입고 그림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또 다른 흑인 여성 작가는 그림을 철거하고 파괴하라고 요구하며 서명 운동을 벌였다. 곧 ‘흑인의 비극을 이용하는 백인 작가와 미술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그에 대한 반론도 나오면서 미술판은 논란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화가는 해명했다. “비록 내가 미국에서 흑인으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엄마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에멧은 매미 틸의 외동아들이었다. (…) 내가 이 이미지를 그리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에게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차별받는 약자와 관련된 문제는 오직 그 그룹에 속하는 예술가만이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열린 관’ 그림은 작가가 백인인 것을 떠나서 인종문제에 대한 접근이 얄팍하고 그림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당연히 이런 미학적 비판은 나올 수 있다. 그 비판이 옳다고 가정할 때, 그렇다면 약자의 고통을 얄팍하게, 혹은 완성도 떨어지게 다룬 작품은 전시조차 하면 안 될까.

‘올해의 작가상’의 섹스돌 다큐 사건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정윤석의 ‘내일’.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정윤석의 ‘내일’.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와 관련된 미술계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2020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오른 미술가 넷 중 유일한 남성 후보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일’이 논란이 됐다. ‘내일’은 중국 리얼돌(섹스돌)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가족과 떨어져 섹스돌 다섯과 함께 사는 중년 남성의 모습, 인공지능 로봇을 정치에 도입하자는 일본 운동가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작가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라는 분노의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한 정당은 작품 철거를 요구하는 성명에서 “해당 전시가 문제 되는 것은 섹스돌 이슈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비판적 관점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인간의 신체가 상품화되는 현실, 일본에서 사용될 섹스돌이 중국에서 생산되며 거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동원되는 현실, 그리고 그런 섹스돌에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인간이 있는 현실 등 “자본주의와 인간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 주제의식은 잘 구현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리얼’하게 사람을 닮은 리얼돌이 무심하고 거칠게 조립되면서 마치 실제 여성 신체가 학대당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필요 이상 많이 나온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손이 리얼돌의 신체 부위에 들어가는 모습이 종종 클로즈업된다. 여성 노동자가 리얼돌을 제조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나타내고자 한 바는 알겠으나, 문제의식보다 선정적인 충격효과만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나오긴 하지만 이들이 리얼돌 제조 노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전시 철회까지 간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검열이 아닐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19 사태로 미술관이 휴관하는 바람에 이 논란은 더 발전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났다. ‘올해의 작가상’은 다른 작가에게 돌아갔다.

비슷한 논란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이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것이 진영 싸움과 증오의 정치로 이어지는 대신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지는가이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어떤 발언이나 예술작품을 비평할 때, 그 화자나 작가가 누구인가, 어떤 젠더·인종·정치성향 등의 정체성을 가지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그 발언과 예술작품 자체에 집중하라는 것, 즉 메신저보다 메시지를 보라는 것이다. 물론 화자나 작가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그 발언과 작품의 해석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요즘은 주객이 전도돼 그 메신저의 정체성에만 집중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면서 편가르기와 혐오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제안은, 범죄를 옹호하는 등의 선 넘은 발언이나 작품이 아니라면, 철회나 사과까지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의의 발언이나 작품이 정치적 올바름을 해쳤을 때는 그냥 비판만 하면 된다. 화자나 작가는 해당 비판은 다음 발언과 작품에서 적게든 많게든 반영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와 공존하며 담론이 풍성해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