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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확 바꾼 ‘조상님 이발’…앞으론 로봇이 대행할까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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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3주일여 앞둔 지난달 31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공원묘지에서 벌초 대행업체 관계자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 [뉴시스]

추석을 3주일여 앞둔 지난달 31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공원묘지에서 벌초 대행업체 관계자들이 벌초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상재 산업2팀장의 픽 : 벌초가 IT를 만났을 때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이모(50대)씨는 지난 주말 선영이 있는 충남 공주로 벌초를 다녀왔다. 코로나19 확산이 걱정돼 이씨네는 예년과 달리 집안의 남자 형제만 모여서 ‘조용히’ 벌초를 마쳤다. 이씨는 “예초기를 들고 반나절가량 잔디와 잡초를 깎고, 묘 주위를 정리했더니 벌초를 한 지 사나흘이 지났어도 여전히 팔목이 후들후들하다”고 말했다.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 지나면 전국 곳곳에서 ‘벌초 행렬’이 이어졌다. 라디오에선 매년 이맘때쯤 주말이면 ‘벌초를 마친 차량이 몰리면서 교통 체증이 빚어지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자주 흘러나왔다. 처서(處暑·양력 8월 23일경)가 지나면 으레 ‘이제 벌초할 때’라는 인식이 있었다.

벌초방학, 임금님이발…‘벌초의 추억’ 되나

지난 2017년 9월 9일 경북 경주시 신라 왕경 유적지 일대에서 열린 ‘신라 임금 이발하는 날’ 행사 모습. 이날 참가들은 직접 가위를 들고 벌초 행사를 체험했다. 왕릉 상단에서는 전문관리인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과껍질 벗겨내듯 벌초를 해 나갔다. [중앙포토]

지난 2017년 9월 9일 경북 경주시 신라 왕경 유적지 일대에서 열린 ‘신라 임금 이발하는 날’ 행사 모습. 이날 참가들은 직접 가위를 들고 벌초 행사를 체험했다. 왕릉 상단에서는 전문관리인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과껍질 벗겨내듯 벌초를 해 나갔다. [중앙포토]

벌초는 전국 단위의 이벤트이기도 했다. 집안사람 수십~100여 명이 모여 벌초하는 풍습이 있는 제주지역 초·중·고엔 음력 8월 1일에 휴교하는 ‘벌초방학’이 있었다. 경주에선 2015년부터 ‘신라임금 이발하는 날’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왕릉과 고분의 벌초를 체험하는 행사로 많을 때는 시민·관광객 3500여 명이 참여했다.

벌에 쏘이거나 뱀·진드기에 물리는 등 크고 작은 사고도 잇달았다. 매년 8~9월에만 벌 쏘임 환자는 평균 4000~5000명에 달했다. 예초기 안전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달 17일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현지의 인력에 벌초를 맡기는 대행 서비스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코로나19는 벌초 문화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지난해 농협이 대행한 벌초 대행 서비스는 2만4422건이었다. 2019년 1만7008건에서 42% 급증했다. 올해는 3만3000건이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산림조합에 접수된 벌초 대행 의뢰도 3만5000건이 넘는다.

최근엔 하루 평균 1600여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정부도 벌초 대행 서비스를 권장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지난 3일 추석 연휴 중 방역지침을 내놓으면서 산림조합·농협 등이 진행하는 벌초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 달라고 권고했다. 직접 벌초를 할 때도 ▶2m 거리 두기 ▶참석 인원과 체류 시간 최소화 등의 지침을 정했다.

코로나19 추석 방역대책

코로나19 추석 방역대책

벌초 과정에서 산발적 코로나19 감염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난 4일 경북 영주로 벌초하러 다녀간 경기 지역 거주자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금까지 대전, 경북 예천, 충남 보령 등에서 벌초를 다녀간 후 연쇄 감염이 일어났다.

올해 농협 대행 서비스 3만 건 넘을 듯

벌초 대행 서비스가 처음 등장한 건 1990년대 중반이다. 예초기가 본격 보급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만 해도 일가친척이 미리 약속을 잡은 다음에 낫과 갈퀴를 들고 공동 작업을 했다.

강원도 원주에 선영이 있다는 신모(48)씨는 “해마다 벌초 일정 맞추기가 쉽지 않았는데, 올해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외지 사람 오면 눈치가 보인다’며 벌초를 지인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앱으로 견적 넣고, 현금영수증도 발행

요즘엔 벌초를 대행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앱 마켓에서 ‘벌초’를 검색하면 농협(NH농협 벌초 대행)과 벌초닷컴, 벌초박사, 조상님이발소 같은 전문업체가 나온다.

사용 방법도 간단하다. 위성지도를 찾는 방법부터 산소 위치 지정 방법, 견적과 추가 요금, 현금영수증 발행 절차 등이 자세히 설명돼 있다. 벌초를 마치면 작업자가 사진을 전송해 확인하는 방식이다. 비용은 묘소 한 기에 8만~20만원 선이다.

향후엔 ‘벌초 로봇’도 등장할 전망이다. 벌초 로봇의 사촌쯤 되는 잔디깎이 로봇은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LG전자는 한국형 잔디깎이 로봇을 출시한다는 계획으로 현재 시범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장애물 감지 센서와 효율적인 주행 패턴, 스마트폰 앱과 연동 등이 주요한 특징이다. 회사 측은 “올해 안에 미국 시장에서 판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LG전자가 시범 서비스 중인 잔디깎이 로봇. [사진 LG전자]

LG전자가 시범 서비스 중인 잔디깎이 로봇. [사진 LG전자]

“기술 문제 해결하고 가격 낮추면 사업성”

김서현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성장지원사업단장은 벌초 로봇에 대해 “산비탈을 오르내리거나 묘의 봉분에서 안정적으로 풀을 깎는 등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 가능하다면 농업용 로봇으로 사업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어 “농업 인구의 고령화 추세, 벌초 문화의 변화 등을 고려하면 시장 잠재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면 이씨가 겪는 ‘벌초 근육통’도 사라지고, 벌 쏘임 사고도 줄어들 수 있을 듯하다. 집안의 뿌리를 확인하고, 친인척과 유대를 돈독히 하는 공동체 문화는 옅어지거나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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