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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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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방현 기자 중앙일보 내셔널부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김방현 대전총국장

청양군은 개발이 덜 된 청정지역이란 이유로 ‘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청양에서도 목면은 10개 읍·면 가운데 인구(1500여 명)가 가장 적다. 주민들은 “동네가 조용해 평소 적막감이 흐른다”고 했다.

이런 목면이 최근 발칵 뒤집혔다. 주민 손모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다. 손씨는 구속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충북동지회)’ 고문 박모씨, 부위원장 윤모씨, 연락담당 박모씨와 함께 북한 지령을 받아 미국산 스텔스기 도입 반대 운동 등을 했다고 구속영장에 나온다. 손씨 구속영장은 두 차례 기각됐다. 이들은 ‘조선노동당’이란 표현을 쓰지 말라는 북한 지침에 따라 이름을 충북동지회로 정했다고 한다.

충청도에서 간첩 사건이 발생한 것은 26년 만이다. 1995년 10월 북파 간첩 2명이 부여군 석성면 한 사찰과 야산 등에 출몰했다. 경찰관 두 명이 이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검거 작전 나흘 만에 한 명은 생포되고 다른 한 명은 사살됐다.

간첩 활동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들이 2017년 5월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간첩 활동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들이 2017년 5월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낮에 총알이 날아다니던 부여 사건 때와 달리 손씨 등은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조용히 활동해 온 게 특징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손씨는 지난해부터 초등학교 학부모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동 돌봄센터 운영 문제 등을 놓고 주민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돌봄센터 설치가 늦어지자 학부모회 이름으로 지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청양군수 지지 철회” 등을 주장했다. 이에 학부모들이 “왜 동의 없이 그런 인터뷰를 하냐”고 항의했다. 주민들은 “손씨가 ‘북한에 보낼 밤나무를 심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손씨 등의 실체가 알려지자 주민들은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딨나’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다”고 했다. “상상도 못 했는데 소름이 돋는다”는 주민도 있었다.

주민들이 수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이들 활동이 시민단체가 수십년간 해온 것과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씨와 손씨는 대전에서 한국타이어 산업재해 진상규명 투쟁 활동을 해왔다. 구청장과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이들은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9·19 평양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정당한 NGO 활동” “국정원의 조작 수사”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에 따르면 박씨는 2004년, 손씨는 2010년 북한 ‘문화교류국’에 포섭된 이후 암약해 왔다.

이번 일로 국민적 안보 불감증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공동대책위원회 등 단체는 여전히 큰 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단체나 노동운동가들은 “손씨 등이 시민사회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았다”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 유지’를 걱정하는 수사당국 외침이 공허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