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만나자는 약속 지켰다|귀순 북한대학생·한대생 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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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8일 오후 서울 창덕궁 가정당 앞 잔디밭에서는 남북의 대학생들이 「뜻밖의 재회」에 감격하고 있었다.
소련 유학 중 지난7월과 8월에 귀순한 북한대학생 정현군(25)과 한성호군(22)·김지일군(26)등이 기자들과 간담회를 마칠 때쯤 한양대생 윤종영군(26·산업미술2) 등 3명이 달려와 정군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다.
『현아, 너 정말 서울에 왔구나.』
『이렇게 살아서 만나다니 꿈만 같다. 너희들 격려가 큰 도움이 됐어.』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7월13일 윤군 등 한양대생 31명이 학술진흥재단 공산권 연수계획에 따라 모스크바를 견학하던 중 마침 방학을 맞아 평양에 가려고 모스크바에 머물던 우크라이나 공학국 도네츠크 공대 4년생인 정군과 마주쳤다.
한인 교포가 경영하는 오작교식당에 들어서던 정군은 남한 학생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자 되돌아가려다 한 학생이 『북한 학생이냐』고 말을 건네 수인사를 나눴다.
남한사회에 관심을 갖고 남몰래 귀순 계획을 품고 있었던 정군은 이들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곧 친해졌고 윤군 등 4명을 자신의 숙소인 스포츠호텔로 초청했다.
정군의 호텔 방에서 저녁을 대접받은 윤군 등은 정군과 함께 방문단 숙소인 세바스트폴 호텔로와 밤 새워 남북의 현실에 대해 솔직한 토론을 벌였다.
정치얘기를 피하려는 윤군 등에게 정군은 오히려 김일성 부자를 비난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아 버렸다.
이튿날 함께 쇼핑을 나간 정군은 윤군 등에게 초컬릿과 레닌모자를 사줬고 윤군은 자신이 차고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선물했다.
이날 밤에도 이들은 호텔 방에서 함께 지내며 웃통을 벗고 기념촬영을 하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유학생 소환령이 떨어져 이번 방학에 평양에 가면 다시 오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정군은 이날 밤 윤군 등에게 자신의 귀순계획을 털어놓았다.
윤군 등은 『꼭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한 뒤 입고있던 티셔츠를 벗어주고 행운의 징표로 팔목에 차고 있던 옥 염주까지 풀어 주었다.
3일 동안 정이 들었던 이들은 7월15일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서로 헤어졌다.
그 후 정군은 하리코브로가 평소 의기투합하던 친구인 김지일군과 함께 탈출을 계획, 7월29일 윤군 등이 준 티셔츠를 입고 서방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두달여만에 서울에서 윤군 등을 만난 정군은 『남자가 한번 한 말은 지켜야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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