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현장에서] 고신용자만 옥죄는 대출규제, 상식이 사라진 금융시장

중앙일보

입력 2021.09.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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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고승범 신임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31일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 금융위 ]

고승범 신임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31일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 금융위 ]

10년 무사고 운전자와 매년 사고를 내는 운전자 중 어느 쪽이 자동차 보험료를 더 많이 내야 할까. 보험료를 한 번이라도 내 봤다면 답은 자명하다. 매년 사고를 내는 운전자의 보험료가 더 높아야 한다.

하지만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지난달 27일 인사청문회에서 고신용자가 금융 혜택을 더 많이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이렇게 물은 유의동 국민의힘 의원의 질문에 “말씀의 취지는 잘 이해하고 있다”며 애매모호하게 답을 흐릴 뿐이었다.

고 위원장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 건 금융 지식이나 상식이 부족해서일 리없다. 현재 시장에서 금융상식에 역행한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탓일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것이 가계 부채 관리를 위해 금융당국이 전격적이며 거세게 시행하는 대출관리 정책이다.

그가 금융위원장에 내정된 8월 초 이후 금융권에는 대출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주요 타깃은 고소득·고신용자들이 받아가는 신용대출이다. 금융당국이 은행과 저축은행, 보험 등 각 금융업권에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이내로 줄이라는 권고를 내려보낸 뒤 신용대출 한도는 속속 줄어들고 있다.

금융사의 대출은 돈을 빌려서 제대로 갚을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게 상식적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도 금융사가 판단할 일이다. 당국의 한마디에 일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 돈줄을 죄다 보니 시장은 ‘대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대출 문이 닫히기 전 미리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 창구로 몰리는 ‘패닉 대출’이 벌어지고 있다.

이사나 전세 계약 등을 앞둔 실수요자는 잠을 못 이룬다. 전세 재계약은 앞둔 김모(34)씨는 “전셋값이 많이 올라 전세 대출로는 부족해 신용대출을 받으려 했는데 한도가 줄어들면서 걱정이 많다”고 했다.

‘패닉 대출’과 ‘대출 발작’에 시장이 요동치고 있지만, 대출 옥죄기의 무풍지대가 있다. 중·저신용자를 대상으로 공급되는 중금리 대출이다. 카카오뱅크는 지난달 30일 보도자료를 내 8월 초 중금리 대출 공급액이 2674억원으로 7월(1140억원)의 두 배로 늘었다고 했다. 시중은행이 신규 대출이 얼마나 줄었는지 주 단위로 금융당국에 보고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기현상이다.

카카오뱅크는 중금리대출을 늘리기 위해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신용점수 820점 이하인 경우 1억원까지 대출해주고, 첫 달 이자까지 대신 내주고 있다. 반면 신용점수 820점 이상의 고신용자는 대출한도를 1억원에서 7000만원으로 줄였다. 금융당국은 “(대출)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 중금리대출 등 정책적 목적의 대출이라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는 입장이다.

상식을 거스르는 금융당국의 ‘제멋대로 대출규제’에 시장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출건전성 관리 등은 핑계고 결국은 집값이 오르니 이를 잡기 위해 부랴부랴 대출을 죄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신용자의 대출이 중·저신용자의 대출보다 더 위험한지 알 수 없지만, 급증한 가계 부채가 내포한 위험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도마 위에 오른 게 고신용자이자인 건 분명하다. 전셋값 마련을 위해 대출을 받으려면 이자 연체라도 해 신용점수를 떨어뜨려야 하는 건지, 상식이 사라진 금융 시장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안효성 금융팀 기자

안효성 금융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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