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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강제징병 조선인 전범 방치’ 헌법소원…헌재, 5대4 각하

중앙일보

입력

헌법재판소가 강제징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해 전범(戰犯)으로 몰린 한국인들의 배상청구권에 대해 한국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5대4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한국인 전범 피해자들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7년 만에 낸 결론이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헌법소원심판 사건 선고기일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헌법소원심판 사건 선고기일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31일 헌법재판소는 고(故) 이학래 동진회(조선인 전범 생존자들 모임) 회장이 “정부가 자국 출신 전범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5명의 의견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재판관 4명은 위헌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일제 강제징병 ‘조선인 전범 수감’ 피해자들 헌법소원

1945년 연합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을 통해 동남아시아 각지 형무소에 일본군 전범들을 수감했다. 이 회장을 포함한 일본군에 강제징병된 조선인 148명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한국인 전범 피해자들은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동원돼 현지에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BC급 전범(통상적 전쟁범죄자 또는 경범)’으로 분류돼 처벌받았다.

이 회장 등은 1950년 일본 스가모 형무소로 이송돼 구금됐다가 가석방 등으로 출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범’ ‘대일협력자’라는 낙인찍힌 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활고를 겪었다. 이후 동진회를 결성해 1991년 도쿄지방재판소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1·2·3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태평양전쟁 한국인 B·C급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고(故) 이학래 동진회(同進?) 회장. [NHK플러스, 뉴시스]

태평양전쟁 한국인 B·C급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고(故) 이학래 동진회(同進?) 회장. [NHK플러스, 뉴시스]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와 달리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대일 보상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이에 이 회장과 유족들은 2014년 “청구권 해석 분쟁이 존재함에도 정부가 청구권 협정 3조에 따른 노력을 하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한일청구권 협정 3조는 관련 내용에 대해 양국 간 분쟁이 생길 경우 외교 등을 통해 해결하도록 규정한다.

헌재 다수 “한국인 전범도 국제법 따라야…청구권 협정 포함 안돼”

하지만 5명의 재판관은 이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먼저 한국인 전범은 국제전범재판소에 의해 발생한 문제인 만큼 “국제법적 지위와 판결의 효력을 존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일청구권 협정은 일본의 문제 행위를 대상으로 삼고 있어 한국인 전범 문제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를 근거로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강제동원돼 제대로 된 통역·변호인 등을 받지 못한 채 처벌받은 안타까운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원폭 피해자 경우와 다르게 국제법을 따라야 한다고 봤다. 앞서 헌재는 재판관 6명의 의견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강제동원에 따른 피해와 관련해 양국 간 청구권 협정 해석에 대한 분쟁이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하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원칙적으로 국제전범재판에 의한 처벌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이 사건 협정과 무관하게 일본이 주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는 태도를 취해왔다”면서다.

해석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분쟁 해결 절차에 나아가야 할 의무는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가 2006년 한국인 BC급전범 피해자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일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일본 의원들을 만나고 보상 입법을 촉구하는 등 노력을 다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대 의견 4명 재판관 "일제 강제동원 피해는 청구권 갖는다" 

반면 이석태·이은애·김기영·이미선 재판관은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입은 피해 가운데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 부분에 관한 다수의견에는 찬성한다”면서도 “한국 정부가 일제의 불법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분쟁해결절차에 나서지 않는 것은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판단 이유로는 “전범 피해자들은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피해자로 인정받아 청구권을 가진다고 봐야하고, 피해 청구권이 소멸하였는지 여부는 한일 양국 간 해석상 분쟁이 존재할뿐더러 이를 가로막으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침해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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