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전·현직 대통령의 부적절한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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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이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했다. 전.현 대통령 내외는 2시간이 넘게 점심 식사까지 함께했다. 김대중도서관 전시실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직접 전직 대통령의 집을 찾은 일은 역대 어떤 대통령에게도 없던 일이다. 두 사람의 이런 파격적 회동이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날 만남은 국민들 눈에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새로 비친다. 노 대통령이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궁지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이지만, 전직 대통령이 특정 지역까지 동원해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두 사람이 유엔사무총장, 부동산, 북핵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정계 개편과 관련해서는 대화가 "일절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치 이야기가 없었다는 말이 잘 믿기지 않지만, 설령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만난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적인 의미는 크다. 두 사람은 최근 여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계개편론의 양대 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계 개편 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두 사람 역시 이런 결과를 계산하고 만났을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에 이렇게 매달리는 모습은 정치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다.

여권의 정계 개편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건 두 사람이 앞장서는 것만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 줘야 할 사람이다. 또 남은 임기 동안 국정 운영에 최선을 다한 뒤 그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정 운영에 실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도 정권 재창출에 매달려 자신의 정책을 연장하려 한다면 국민이 받아들이겠는가. 김 전 대통령은 본인이 원하건 않건 지역구도의 상징이다. 노 대통령도 그 굴레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이 다시 정계 개편에 끼어들려 하고, 노 대통령은 그런 행보에 편승하려 하는 정치 현실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