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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햇볕' 동방정책 펴던 70년대 서독 상황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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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의 '386세대 간첩단' 사건은 1970년대 동독 슈타지(국가보위부)가 서독에서 대규모로 펼쳤던 간첩활동을 연상시킨다. 통일 이전 당시 서독에서는 한국의 포용정책과 비슷한 '동방정책'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 정부의 이런 유화정책을 틈타 총리(내각책임제) 비서실 등 핵심 기관을 비롯해 서독 곳곳에 다수의 간첩을 침투시켰다. 당시 동독 간첩에 포섭된 서독인 가운데는 좌파 계열 정당원과 지식인이 많았다. 동독 전문 연구기관인 베를린 자유대학의 '동독 독재체제 연구협회'는 "당시 서독인들의 안일한 자세는 정부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화해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것에 영향받은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 한국과 유사점=70년대 초반 서독은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으로 하여금 '접근을 통한 변화'를 유도하려고 했다. 일종의 한국식 햇볕정책이었다. 당시 서독은 동독 정부와 정치적 접촉을 크게 늘렸다. 그 과정에서 50년대 제정된 국가보안법을 유명무실하게 개정했다. 공산주의자와의 접촉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법이 더 이상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사문화되다시피한 현 한국 상황과 비슷했다.

73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서독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했다. 이후 서독에선 동독을 체제 위협 요소로 보는 시각이 사라졌다. 특히 서독인들이 동독에 있는 친지를 만나러 가는데 필요한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는 등 긴장상태가 크게 완화되면서 동독의 첩보활동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으로 남북 민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 한국과 유사한 점이다.

당시 서독 주민들은 "공작활동은 모든 국가가 하는 것"이라며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동독은 첩보기관을 확대하고 서독에 대한 공작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 서독을 누빈 동독 간첩들=슈타지는 서독 곳곳에 손을 뻗쳤다. 정규직원 9만4300명에 17만4200명에 이르는 비공식 끄나풀(IM)을 동원해 각계각층에 침투했다. 총리실.정당.언론.문화계.스포츠계.학계.노동조합.군부.교회는 물론 서독의 정보기관에까지 파고들었다. 무려 3만여 명의 동독 간첩들은 서독 수도였던 본을 포함한 주요 도시에서 독일 통일(1990년) 전까지 40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했다.

간첩들은 서독의 정치인.정당원들에게 접근해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80년대 서독에서 형사 처벌된 499명의 동독 정보원 가운데 30% 선인 135명이 정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좌파인 사민당원이 42%로 가장 많았다. 이들의 동독 첩자들에 대한 협력은 대부분 정치적 신념에 따라 이뤄졌다. 한국의 '386세대 간첩단' 사건은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면 북한 김정일 정권에 동조하거나 반미.좌파세력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요 포섭 대상이었다.

◆ 적발된 주요 사건=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비서로 근무하던 귄터 기욤이 동독으로 국가 기밀을 빼돌린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휠제'란 암호명을 쓴 쿠르트 반트는 50년대 사민당에 침투해 암약했던 최고위 공작원이었다.

국방부 여직원 에리카 슈미트는 '에리히'란 암호명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관한 1216건의 기밀을 빼내 슈타지의 공적을 올려줬다. 서독 주재 외국 공관도 슈타지의 표적이었다. 미국 대사관 여직원으로 근무하던 독일 현지 직원 가브리엘레 알빈은 1479건의 기밀을 슈타지에 제공한 일급 첩자였다. 그는 '게어하르트'란 코드명으로 게파르트 장갑차와 중거리 미사일 퍼싱 등 군사 관련 정보와 서유럽 주둔 미군 동향에 관한 기밀을 보고했다.

독일 노동조합연맹(DGB) 집행부 부장을 지낸 귄터 셰어, '막스'란 별칭으로 불렸던 언론인 루돌프 메르커, '한스'와 '마르첼라'라는 암호명으로 등록한 부부 공작원도 대표적인 고정간첩들이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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