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그래도 노 정권에 걸어보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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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이 미국.중국과의 3자 협상을 통해 6자회담 복귀를 선언했다. 일본은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통보받았단다. 하지만 이 나라는 완전한 청맹과니 신세였다. 그야말로 '타짜'끼리 화투치는데 훈수는커녕 곁눈질 한번 못해 보고 물먹은 꼴이다. 이게 이 나라 내치와 외교의 현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선거로 뽑힌 대통령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이 난을 통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금 개혁을 이뤄줄 것을 당부드리기도 했다. 그런 기대는 이제 조용히 접고 세월 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1년여의 임기를 남기고 있는 노무현 정부에 아직도 기회가 있고, 그 기회를 잡겠다는 생각은 그의 무서운 오기 속에 살아 있다고 믿고 싶다.

지난주 제주도는 곳곳이 노란 물결이었다. 도로 옆 여기저기 돌담과 방풍림 속에선 밀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고, 한쪽에선 한.미 FTA 저지를 다짐하는 노란 깃발과 플래카드가 날리고 있었다. 협상장인 중문단지 입구, 출입증을 받고 몇 겹의 경찰 바리케이드를 통과해 숙소로 들어가 멀리 바다를 보며 한.미 FTA의 운명을 생각했다.

1980년대 바나나 수입자유화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농민단체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농협에서 조사한 우리 국민의 과일 선호도에 바나나는 제법 높은 순위에 올라 있었고, 특히 10대의 응답에선 압도적 1등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개방이 되면 바나나가 시장을 휩쓰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 속에 개방은 이뤄졌고 시장엔 바나나가 넘쳐났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수많은 수입업자가 쓰러졌고, 바나나는 많은 과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우리 과일이 갖고 있는 경쟁력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미국산 감자도, 칠레산 포도도, 뉴질랜드산 키위도 문 열 때의 걱정과 달리 다 그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산 전자제품이 들어올 때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전자제품이라면 일제가 최고급으로 당연히 인식되던 시절, 이유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한국산 제품은 결코 안방을 내어주지 않았다. 내주긴커녕 세계 곳곳에서 적어도 동급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 제조업은 치열한 내부 경쟁과 개방의 확대 속에서 체력을 다져왔기 때문이다.

개방과 경쟁은 두렵고 때론 피하고 싶은 일이겠지만 피할 수 있는 것도, 피해서도 되는 게 아니다.

태평양으로 열린 바다를 보며 동아시아의 근세사를 떠올렸다. 어느 모로 보나 지난 1000년의 전반기엔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중국이 후반기에 처절히 무너진 건 스스로 빗장을 건 명(明) 초기의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세기 초반 명나라가 아프리카 해변까지 주름잡던 정화(鄭和)제독의 대함대를 거둬들이며 바다를 막고, 위로는 만리장성의 대대적 수축에 나서던 그때부터 중국이란 대제국은 쇠락의 길로 향했다. 일본이 지난 1000년의 마지막 100여 년을 동아시아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큰 계기 중 하나는 나가사키항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라는, 서양을 향한 작은 출구였다. 그 출구가 세상을 읽는 통로가 됐고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보다 한발 앞서 개방과 경쟁의 길로 들어서는 하나의 동인(動因)이 됐다.

스스로도 이제 대견할 만큼 커진 우리의 경제력 또한 이런 개방과 경쟁을 통해 이뤄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큰 흐름 속에 또다시 떠오른 도전의 기회가 바로 한.미 FTA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족하는 것은 개인에겐 미덕일 수 있으나 나라의 경우엔 미래 세대에 대한 일종의 직무유기다.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빌미로 협상을 결렬시킬 것이란 정치적 음모론이 유령처럼 떠다닌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노 대통령의 역사적 통찰력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시간과 권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무서운 오기가 이런 데 쓰이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