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멋-버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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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사뿐 푸른 섬돌을 딛고 보면/버선발은 희고 차가우나/버선코는 그 무슨 감촉으로/……/주름지지 않고 한 가닥 느린 선은/뚝뚝 기와와 추녀에서 듣는/하늘 빛깔을 흘리며/……/한마리 나비라도 날듯/사뿐 뒷걸음치는 버선발은/……/왼 몸에 둘러 내리는 가는 선이여.」
31세로 요절한 이성환 시인(1936∼l966)의 주옥같은 시 「버선」의 한 구절이다.
한국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겨 신던 버선, 처마의 선처럼 그것은 한국의 멋과 아름다움인 「선」을 대표한다.
한복의 멋은 저고리의 날렵한 어깨선 깃과 섶의 선에서 나오고, 맵시 있게 늘어진 선은 치맛자락 밑에 외씨 같은 버선코에서 매듭 짓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한복의 흐드러진 멋은 바로 버선코에서 완성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복이 품위 있고 우아하게 보이려면 버선발에 고무신을 신어야 제멋을 낸다고 한다.
버선은 본래 남녀노소 누구나발에 끼어 모양을 잡고 발을 따스하게 하는 기능을 가졌다. 따라서 「발에 신는 옷」이라는 뜻으로 족의라고도 했다. 서양 문물이 들어와서는「서양버선」이란 뜻의 「양말」이 되었다.
버선은 대개 청결을 상징하는 흰색의 목면으로 만들었고, 조상들은 한여름 복더위에도 버선을 신어 그 우아함과 품위를 지켜왔다.
버선은 시대에 따라서 그 형태와 종류도 조금씩 변해왔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버선을 신기 시작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전문가들은 초기의 버선이 오늘날과 같은 분리형이 아니었고 바지에 붙은 연말이었다고 한다. 또 삼국시대엔 계급에 따라 재료가 달랐고 능·나·주 등 고급직물이 사용되기도 했다.
버선의 종류는 바느질 방법에 따라 솜버선·겹버선·홑버선·누비버선·타래버선·꽃버선 등으로 나뉘고 버선목과 수눅(꿰맨 솔기)이 이어지는 곡선에 따라 곧은 버선과 누인 버선으로도 나뉜다.
한복이 지닌 우아함과 휘감기는 멋에 치맛자락의 선율 아래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버선, 그 버선은 혼수의 필수품목으로 따라다니며 집안 어른의 인사물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돌아갈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라고 읊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시처럼 한국의 멋을 곱게 매듭지어 주고 한결 돋보이게 하는 버선.
한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버선도 이젠 거침없이 몰려드는 양말과 스타킹 문화에 떼밀려거의 사라져 가고 있어 한결 아쉬움을 더해 준다. <배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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