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작약꽃밭의 악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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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반야봉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열두 살 적의 별밭 이랑 사이로 참매가 날아가고 검둥이와 함께 한 소년이 기차를 따라 뛰어갑니다. 외로운 아이는 작약꽃밭의 악동. 지금은 기적소리마저 녹슨 간이역, 구랑리역 솔숲 아래 오두막집이 하나. 봄마다 작약꽃들이 피었지요.

아침 통학열차가 멈추기도 전에 검정치마 여고생들이 뛰어내리면, 소년은 어깨 위에 참매를 앉히고 불개를 앞세우는 파수꾼입니다. 야, 작약꽃밭의 악동! 한 송이만, 국어선생 드릴 거야. 안돼, 누나는 안돼. 저번에 훔쳐 갔잖아. 오늘은 저기 저 예쁜 누나! 미리 꺾어둔 꽃다발을 슬며시 건네는 소년의 볼에도 붉은 작약꽃이 핍니다.

잠시 기차가 머무는 사이 작약꽃밭은 여고생 꽃도둑들과 어린 악동의 아라리난장입니다. 매일 바뀌는 주인공 누나와 작약꽃 한 다발이 날마다 통학열차를 달리게 했지요. 반야봉의 열두 살 적 별밭 이랑 사이로 가은발 점촌행 통학열차의 기적소리가 울리면, 나는 아직 어린 작약꽃밭의 악동이 되어 참매야, 검둥아, 누나야! 불러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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