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오염」 잦았던 아주 게임|북경 대회 40일 앞두고 알아본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30억 아시아인들의 스포츠 대잔치 90북경 아시아드가 개막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앞으로 40일. 북경 아시아드를 밝혀줄 성화가 지난 8일 티베트의 수도 라사 북방 1백㎞지점에 위치한 스야이켄 탕글라산에서 채화됨으로써 중국 전역은 대회 무드를 고조시키기 시작했다.
지난해 천안문 사태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던 북경 아시아드는 OCA (아시아올림픽평의회) 가맹 38개국이 모두 참가, 사상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최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빚은 충격은 북경 아시아드에도 파문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사태 진전 여하에 따라 일부 중동 국가들의 참가가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열 한돌째를 맞는 아시아드.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을 모토로 출범 (51년),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인들의 단결과 발전, 나아가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동 번영에 이바지함을 창립 이념으로 담고 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침략과 식민 정책에 희생되었던 아시아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과 건설의 새로운 의지 속에 공동 번영을 희구하는 염원의 하나로 이와 같은 종합 스포츠 제전이 창설된 것이다.
50년 AGF (아시아경기연맹)가 창설되고 그 이듬해인 51년3월 인도 뉴델리에서 첫 대회의 성화가 타올랐다.
당시 혼미하던 국제 정세 속에 인도를 비롯한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이 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다 아시안게임의 창설이 실현되었으며 당시 인도 IOC위원이던 손디씨가 주도적 산파역을 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도 올림픽과 다름없이 회를 거듭할수록 정치에 오염되고 정치적 굴절을 겪고 만다..
제4회 자카르타 대회 (62년)가 이와 같은 파행으로 얼룩진 대표적인 예다. 이 대회는 개최국 인도네시아가 AGF회원국인 이스라엘·대만의 초청을 거부, 대회 이념에 지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당시 수카르노 정부가 『대만이 인도네시아 반정부군을 도왔으며 이스라엘은 아랍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해친다』는 이유로 선수단의 비자 발급을 거부했던 것.
이 사건은 곧 AGF를 분열로 몰고 갔고 IOC를 비롯한 국제 육상 경기 연맹 (IAAF)·국제 역도 연맹 (IWF) 등이 대회 공인을 취소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됐다.
그러나 대회는 강행됐고 이에 맞서 대회 불법화를 주창했던 손디 IOC위원은 강제 출국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듬해 2월 로잔에서 열린 IOC집행위원회는 인도네시아 올림픽 위원회에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으며 인도네시아는 IOC를 탈퇴했다.
IOC의 강경 대응은 바로 그해 8월 인도네시아 주도의 신생국 경기 대회 (GANEFO) 창설의 빌미를 제공, 국제 스포츠계는 격심한 분열과 혼탁에 빠졌다.
GANEFO는 북한도 참여한 가운데 2년마다 열리다 3회 캄보디아 대회를 끝으로 해체됐다.
74년 제7회 테헤란 대회 때도 정치적 오염상이 심각했다. 중국·북한 등 이른바 아시아 공산 국가들이 첫 모습을 드러내면서 AGF와 대회 분위기는 급변, 대만은 중국의 입김에 떼밀려 AGF로부터 축출 당해 이 대회에 참가조차 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18명의 소규모 선수단을 파견했으나 아랍 국가들의 철저한 배격으로 발 붙일 틈을 찾지 못했다.
아랍 제국·중국은 노골적인 불만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펜싱 경기를 거부하고 나섰고 이에 동조한 파키스탄·북한도 농구·축구 경기를 각각 거부함으로써 스포츠에서의 「정치적 오염」이 극에 달했다.
78년 제8회 방콕 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일 달러로 중무장한 아랍 제국은 급기야 이스라엘을 AGF에서 축출시켰고 대만 역시 대회 출전을 여전히 금지 당했다.
순수한 아마추어 스포츠 정신은 사라지고 종교적·이념적 갈등만 심화돼 갔다.
대회의 반납 속출도 아시안게임의 어두운 과거를 장식하는 주요사건이다.
KOC (대한올림픽위원회) 총회 결의로 유치키로 한 제6회 대회 (70년)의 서울 개최는 66년 방콕 대회 기간 중에 열린 AGF총회에서 통과, 확정됐다. 우여곡절 속에 이룬 경사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이듬해 6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반납되고 만다. 재정적인 부담 (개최 비용 7억5천만원·당시 환율로 약 2백80만 달러)이 크다는게 이유였다. 체육계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상된 국가 위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최권을 넘겨줄 국가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AGF는 멕시코 총회에서 한국의 대회 반납을 받아들여 태국에 개최권을 넘겼다. 한국이 대회 경비 25만 달러, 일본·말레이시아 등 9개국이 16만 달러를 분담하는 조건이었다.
78년 8회 대회 또한 당초 싱가포르가 유치했다 반납, 파키스탄이 떠맡았으나 파키스탄도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반납해버렸다.
대회 유산을 막기 위해 AGF는 경제 대국 일본에 요청했으나 깨끗이 거절당했고 급기야 장기영 당시 AGF명예회장이 나서 아랍 5개국이 2백만 달러, 나머지 참가국들이 50만 달러를 각각 분담, 모두 2백50만 달러를 태국에 전달함으로써 성화는 방콕에서 또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치른 10개 대회 중 유독 태국에서만 세차례나 치러진 역사는 이처럼 파행적이었던 AGF의 슬픈 운명과 발자취를 대변하는 것이다.
AGF는 제9회 인도 뉴델리 대회를 끝으로 31년간의 역사를 마감, OCA로 재출범 했다.
82년12월 뉴델리에서 창립 총회를 갖고 아랍권·중국의 주도로 닻을 올린 OCA는 86서울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르긴 했으나 북한의 불참을 저지하지 못해 흠을 남겼다.
이제 아시아의 대국 중국이 내부적 민주화 요구를 억누른 채 처음으로 개최하는 국제 종합 체전은 어떤 역사를 엮을지 세계인의 관심거리임에 틀림없다. <전종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