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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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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 나라 민속 여름용품들은 대나무로 만든 죽세공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부채와 평상·베개·발·죽석 등은 대나무의 차가운 감촉을 살러 만든 이른바 여름용 아이디어 상품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이 바로 죽부인이다.
길이 1m20cm, 지름 65cm조 무게 약 1kg쯤 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이 죽부인은 남성들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완구용 침구류다.
무더운 여름날 죽부인을 안고 자면 차가운 대의 촉감과 아울러 이불을 덮어도 그 속에까지 통풍이 잘돼 더운 줄을 모른다.
한국의 전통적인 윤리관은 아버지가 애용하던 죽부인을 아들이 물려받아 사용하지 못하게 돼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는 함께 묻어주거나 불에 태워 없앴다.
안채와 사랑채가 엄격히 구분된 전통적인 가옥 구조에서나 볼 수 있는 풍속도임에 틀림없다.
고려시대 이후 결혼한 남성들 사이에서만 사용돼 왔던 죽부인은 납량과 양생 두가지 면에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죽부인의 생명은 그 탄력성에 있다. 남성들만의 기호품인지라 웬만큼 힘껏 껴안아도 으스러지지 않는게 특징이다. 죽부인을 만들 때 반드시 겉대만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국내 유일의 죽부인 생산지는 전남 담양군 무정면 영천리. 이 마을에서 20년째 죽부인을 만들어오고 있는 김을식씨 (39)는 『하루 평균 10개 가량 생산하고 있지만 요즘 같은 성수기에는 수요를 대기가 바쁠 정도』라고 말한다.
김씨가 지금까지 생산해온 죽부인은 연 4백개 정도. 그러나 최근 수요가 늘어나 올해는 5백개까지 공급량을 늘릴 계획이다.
성숙기인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문 생산에 의존하는 죽부인은 산지에서 1만5천원, 서울 유명 백화점 등에서는 2만5천원씩에 각각 판매되고 있다.
용인 민속 초대 남부 지방 대가에는 조선조시대 어느 선비가 사용했다는 죽부인 2개가 지금도 탄력을 간직한 채 사랑방 벽 쪽에 걸려 있다.
서울 강남 모 백화점 죽세품 코너 판매원인 K양은 『5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관절염이나 신경통에 좋다」며 사 가는데 요즘 하루 평균 5개 이상씩 나간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된 산업 사회이지만 조상의 슬기와 멋이 담긴 죽부인 한개쯤 거실에 두고 여름을 난다고 해서 이야기 속의 안방마님처럼 질투하거나 시기할 현대 주부는 없을 것이다. <김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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