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위' 짐 검사에 꼭 걸리고 승객들도 잠재적 범죄자 보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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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의 카트린 벤홀트 기자가 이슬람 여성들이 사용하는 두건인 히잡을 쓰고 미국 워싱턴의 덜레스 국제공항에 서 있다. [IHT제공]

9.11 테러 이후 미국.유럽에 사는 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충이 가장 큰 곳은 역시 공항이다. 유독 심한 검문검색을 당해야 하고 승객들도 주변을 슬슬 피하기 일쑤란 것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의 독일 출신 여기자 카트린 벤홀트는 이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슬림 복장을 하고 워싱턴발 파리행 비행기에 타본 뒤 20일 생생한 체험 기사를 실었다.

벤홀트 기자는 얼굴만 내놓는 히잡(이슬람 여성의 머리 두건)을 쓰고 금발머리를 완전히 가린 채 미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들어섰다. 발목과 손목까지 검은색 스커트와 셔츠로 가렸다. 무슬림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 손에 코란까지 들었다.

친구가 그의 사진을 찍어주자 "자살 테러에 앞서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는가 보다"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독일인 부부였다.

출국장 입구에선 여성 안전요원이 기내 음료 반입 여부를 검사하며 "라마단(단식월) 기간이니 음료수는 휴대하지 않았겠죠"라고 질문했다. 줄을 서 있는 그가 독일 여권을 들고 있는 걸 본 한 남자는 대뜸 "터키인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이번엔 "그러면 독일-터키 혼혈이냐"고 다시 물었다. 독일에 사는 무슬림은 무조건 터키 이주 노동자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X-선 검색대를 통과하자 이번엔 "짐 검사 대상으로 선정됐으니 이쪽으로 오라"는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가 "왜 나만 받느냐"고 묻자 "무작위로 선정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벤홀트는 "시카고의 한 팔레스타인 출신 종교지도자가 '10번 이상 당하다 보면 도저히 무작위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고통 때문에 대부분의 무슬림 젊은이들은 해외여행 때 최대한 무슬림 복장을 피한다고 한다"며 "한 무슬림 청년은 미국인처럼 보이기 위해 야구 모자를 쓴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벤홀트는 탑승 전 한 미국 흑인과 대화를 나눈 뒤 충격을 받았다. 그가 "승객들이 예전과 달리 요즘엔 비행기 옆 좌석에 흑인이 앉아도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다"라며 "최소한 아랍인은 아니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벤홀트의 오른쪽에 앉은 영국 여성과 왼쪽에 앉은 브라질 남성은 비행 내내 그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벤홀트는 "이날 나는 더 이상 여자도, 독일인도, 기자도 아니었다"며 "단지 무슬림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미국의 젊은 무슬림들이 '비행기에서 무슬림은 심야에 돌아다니는 흑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무고함이 입증될 때까지는 잠재적 범죄자일 뿐이다'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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