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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십대의 반항」미 영화제 특별상 김기영감독 출세작으로 평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명동 길바닥에서 김지미를 스카우트한 김기영은 그녀를 『황혼열차』(57년)에 데뷔시키고 『초설』(58년)에 주연을 시키나 곧 홍성기 감독에게 뺏긴다(?). 최무룡·김승호·김지미가 다 김기영 영화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김기영은 『주검의 상자』(54년)이후 『육식동물』(84년)까지 30년간 29편을 발표하는데 그중 7편이 대표작 2백편에 선정, 수록된다. 별로 많지않은 작품수에 비해 대단히 높은 예술적·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십대의 반항』(59년)은 샌프란시스코영화제 특별상을 받고, 『화녀』(71년)는 시체스영화제 여우주연상(윤여정)을 받고, 『화녀84』는 아시아영화제 미술감독상을 받는다.
『십대의 반항』을 하게되면서 오영진과 의가 상한다. 『십대의 반항』의 각본은 으레 자기에게 줄줄 알았는데 오영진은 그것을 친한 이병일감독에게 주었다. 김기영은 섭섭했다. 평양고보 선·후배관계가 보통이 아니고 집도 사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왜 내게 안주고 이병일에게 줬느냐고 따졌더니 오영진 왈 『넌 아직멀었어.』
오영진은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꾹 참고 『내가 뺏어 하겠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 자리에서 이병일을 찾아가 각본을 달라고 했더니 순순히 줬다. 이병일은 신사였다. 그러나 오영진은 반대하고 나섰다. 김기영은 제작자에게 연출비를 안받겠다고 했다. 제작자는 좋아서 당장 하라고 했다.
오영진은 화를 냈다.
김기영은 자기가 연출하는 모든 각본을 자기식으로 뜯어고치는데 오영진은 자기 각본대로 하기를 절대로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오영진은 녹음대본을 입수해 가지고 와서 감시를 했다. 오영진이 와있으면 오영진대본으로 하는체 하고, 오영진이 가면 자기대본으로 했다. 그후 오영진과는 아주 틀어져 말을 안했다.
60년 마닐라 아시아영화제가 열렸을 때는 일본 오즈 야스니로(소천안이낭)의 『아키비요리』(가을날씨), 신상옥의 『성춘향』, 김기영의 『하녀』가 각축을 벌였다. 심사위원인 오영진에게 『하녀』를 밀어달라고 했더니 『그게 무슨 영화냐? 한국인이라면 「성춘향」을 밀어야지』가 그의 차가운 대답이었다.
오영진의 유명한 『시집가는 날』 『배뱅이굿』은 그가 이미 20대초반에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들이다.
그의 명성은 일본영화계에까지 알려져 오영진은 우선 도요다 시로(풍전사낭) 감독의 「third」(3번조감독)로 들어가게 된다. 도요다감독의 「first」(1번조감독)는 역시 한국인인 윤용규였다. 해방후 오영진은 함세덕의 희곡 『당증』을 『마음의 고향』이라는 시나리오로 쓴다. 오영진이 직접 연츨할 수도 있었으나 선배인 윤용규에게 양보한다. 『마음의 고향』(49년)은 그당시 수도극장에서 개봉돼 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필자도 영화가 끝난뒤 멍하니 좌석에 앉아있던 기억이 난다.
극작가 함세덕은 해방후 활동하다가 월북, 6·25때 다시 내려오다가 연세대학교 뒤에서 유탄에 맞아 죽는다. 윤용규는 상당한 인격자로 기억되고있다. 한국의 영화감독전에는 『마음의 고향』 단 한편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오영진은 해방직후 평양에서 국립영화촬영소장을 하다가 월남하는데 북한에서 자객이 내려와 권총으로 습격, 어깨와 배에 1발씩 2발을 맞는다. 오영진은 4·19후 장면총리의 고문을 지낸다. 그는 죽기 전에 김기영을 찾아가 본다.
김기영 영화중 대표작 2백선에 수록돼있는 7편은 『십대의 반항』, 『하여』, 『현해탄은 알고있다』(61년), 『고려장』(63년), 『렌의 애가』(69년), 『화녀』(71년), 『충녀』(72년).
김기영은 영화계에선 가장 기벽이 많은 사람으로 통한다. 요새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한때는 고무신짝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이 남산적십자사 근처에 있었는데 북한적십자사대표들이 봤다고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창문을 좀 닦아달라고 파출소직원이 말했더니 갸들 왔다고 내가 왜 창문을 닦느냐고 불응해 파출소에서 청소부를 데리고 와 창문을 닦았다. 부인이 치과의사지만 이를 별로 안 닦는다. 논리인즉 동물은 이를 안닦아도 건강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로케중에는 이를 닦을 생각이 들어 정일성 촬영기사에게 치약을 달래서 쓴다. 『글세, 내 치약을 이만큼(2cm쯤)이나 손가락에 빼가잖아』가 정일성기사의 말이다. 두 사람은 다 영화계의 유수한 노랭이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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