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중견기업] 코미디로 '회사의 영광'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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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웰컴 투 애틀랜틱시티, 굿 럭."

1987년 여름. 애틀랜틱시티의 카지노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 때만 해도 태원엔터테인먼트 정태원 공동대표(42.사진)는 이 짧은 통화가 그의 인생을 바꿀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한마디는 한국 조폭 코미디 영화의 대표작 '가문의 영광'을 만들고 '반지의 제왕'을 수입해 '대박'을 낸 태원엔터테인먼트사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 이상의 '쪽박'은 없다=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 상대로 작은 공연기획 사업을 하던 정 대표가 '큰 일'을 벌인 게 87년. 도박도시 애틀랜틱시티에서 카지노 손님을 상대로 볼쇼이 아이스 발레단 초청 공연을 기획한 것이다. 교포들로부터 120만 달러를 모았다. 친분 있는 미국 정치인 도움도 받았다. 가까스로 공연장 섭외까지 마쳤을 때 뜻밖의 걸림돌에 부딪혔다. 당시 애틀랜틱시티의 11개 카지노 가운데 4개를 소유한 트럼프 역시 비슷한 성격의 소련 서커스단 초청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는 냉혹했다. 일면식도 없던 정대표에게 한 전화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이후 홍보대행사에서부터 포스터 인쇄소까지 계약이 모두 취소됐다. 얼음 얼리는 기계까지 시카고에서 빌려와야 했다. 가까스로 개막은 했지만 참패였다. 트럼프의 공세에 밀려 변변한 홍보조차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60만 달러를 선뜻 내주었던 교포 투자자를 찾아가 "일해서 갚겠다"고 했다. 빨리 갚으려면 돈 되는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영화였다. 외화를 사다 한국에 팔고 수수료를 챙겼다. 1년 만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영화 수입.배급을 계속하다 95년 독립해 세운 게 태원엔터테인먼트다.

정 대표는 "이때 경험 덕에 '대박'을 쫓기보다 '쪽박'을 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며 "10년 동안 큰 위기 없이 회사를 경영한 것도 이때 사건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가문의 위기' 딛고 '가문의 부활'로=회사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미래도 없었다. 대기업들이 영화 배급을 독차지하면서 거기에 줄 서지 않으면 영화를 찍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소신껏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DVD 제작.유통업체였던 스펙트럼DVD를 통해 우회상장을 했다. 그러나 이 우회상장으로 정 대표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영화배우 하지원씨와 함께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기업 이미지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상처를 입었다. 무혐의로 끝났지만 배운 게 많았다.

우회상장한 몇몇 엔터테인먼트 업체가 실적 부진으로 허덕였지만 태원엔터테인먼트는 올 상반기에 순익을 기록했다. 현재 개봉중인 '가문의 부활'을 비롯, '반지의 제왕'이후 최대 판타지 대작으로 손꼽히는 '황금 나침반' 등 기대작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어 하반기 전망은 더 밝다. 안정적 수익원 확보를 위해 영화와 DVD 외에 최근 드라마 제작과 컴퓨터 그래픽, 케이블 채널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상장 후 가장 달라진 점은 더 이상 취미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엔 그저 만들고 싶어 만든 영화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철저히 수익을 따져 작품을 결정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코미디다. 코미디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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