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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칼럼

"우리는 빈말하지 않습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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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미국은 우리를 몰라도 정말 너무 모릅네다."

북한 외무성이 핵실험 강행 의사를 공식 천명한 3일, 평양에서 만난 민족화해협의회 북측 관계자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힘으로 압박하고, 위협하면 우리가 굴복할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건 우리 사회와 체제를 잘 몰라서 하는 완전한 오산"이라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면서도 "우리는 한다면 합네다. 결코 빈말하지 않습네다"라고 호언했다.

외무성 성명을 낭독하는 조선중앙텔레비전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에서는 독기가 느껴졌다. 단어 하나하나를 딱딱 끊어 가며 선언하듯 읽어 나갔다. "핵 억제력 확보의 필수적 공정상 요구인 핵실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대목에서 특히 톤이 높아졌다.

성명서 낭독이 끝나자마자 텔레비전에서는 '천만이 총폭탄 되리라'는 섬뜩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어떤 봉쇄도 압력도 우리를 놀래지 못하리"로 시작된 노래는 "천만이 총폭탄 되리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로 끝이 났다. 반복되는 후렴구는 "우리는 빈말 안 한다"였다.

북한은 빈말을 하지 않고, 정말로 핵실험을 강행할 것인가. 적어도 엄포의 단계는 지났다는 것이 평양 현지에서 받은 느낌이다. 핵실험을 위한 준비 작업을 이미 진행하고 있으며, 금융제재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의 직접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핵실험은 실시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노동신문 3일자에는 '조.미 직접대화만이 문제 해결의 방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국제사회의 목소리를 종합하는 형식으로 "오늘의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가장 건설적인 방도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와 경제제재 문제를 놓고 미국과 조선 대표들이 직접협상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종 구호들이 평양 시내를 뒤덮고 있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군사적 자위력 확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선군정치와 관련한 구호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 '선군혁명 강성대국' '군민일치 사상 만세'라고 쓴 빨간 글씨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지금 평양에서 추석 기분은 찾아볼 수 없다. 대동강 너머로 주체탑이 바라보이는 김일성 광장에서 남녀 청년학생들이 벌이고 있는 대규모 공연 연습이 눈길을 끌 뿐이다. 노동당 창건 61주년(10월 10일)과 제국주의 타도 동맹 결성 80주년(10월 17일)을 기념하는 행사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주도한 김일성 주석이 반제(反帝)의 기치를 높이 든 지 80년이 되는 해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북측 안내원의 설명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유가족 방북 성묘단을 따라간 '기자선생'에게 북측 관계자들이 틈만 나면 강조한 얘기는 '우리 민족끼리'였다. '미국놈'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끼리 자주적 평화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과 존엄성.자주도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였다.

국제 질서는 진공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통일이라는 게 우리의 의지와 역량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는 원론적 얘기는 그들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기본적 인식의 출발점 자체가 서로 다르다 보니 얘기는 겉돌기 일쑤였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의지 표명으로 한반도 정세는 다시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 것은 남한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되면 남한으로서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움직여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지렛대마저 잃게 된다. 말로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면서 같은 민족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꼴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남북 정부 당국 간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창구조차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전제 아래 모든 정책과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진실의 시간'이 온 것 같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평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