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전기가 되려면…/노대통령이 일본에 남긴 숙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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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과의 성실성과 심도를 둘러싸고 개운찮은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노대통령의 방일은 두 나라 협력관계를 새출발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본당국이 앞으로 한일관계에 있어서 어떤 자세와 기본인식을 갖느냐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노대통령 방일 결과로 나온 양국간의 협정및 합의사항은 정상급 외교의 구체적 결과로서는 지극히 지엽적인 것임을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나 사할린동포의 귀환·보상문제도 그 개선을 「원칙적으로」 합의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번 대통령 방일이 꼭 필요한 것이었느냐,또 어떤 성과가 있었느냐는 평가의 단서를 구체적 합의사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측이 강조하고 있는 이른바 「미래지향적」 새 한일관계를 앞으로 어떤 정신과 자세로 접근해 올 것인지를 주시하고자 한다.
첫 과제는 물론 이번에 체결 또는 합의된 사항과 「원칙적으로」 개선하기로 약속한 제반사안을 신속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일이다. 이 문제들을 또 다시 실무선에서 여러 구실을 달아 흐지부지 하려든다면 그나마 마련된 계기는 무위로 돌아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첫째,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성적인 한국의 대일 무역역조와 수직적 분업관계의 구조를 시정하기 위한 일본측 노력이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시장개방의 확대및 첨단기술의 이전문제와 밀접히 관련된 문제다.
이 분야의 시정없이는 동아시아든 태평양지역이든 간에 동반자로서 21세기를 같이 주도한다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한국경제의 대일 종속을 오히려 지금보다 심화시킬 뿐이다. 그것은 지역단위로 공생공존을 지향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추세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둘째,외교분야에서 일본은 남북한을 서로 견제해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북한이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로 상호신뢰 구축을 통한 통일에의 길을 열어 보려고 탐색중인 이 민감한 시점에 일본이 다시 「등거리 외교」라는 망령을 되살리려 한다면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21세기를 향한 준비기인 이 시대가 아시아의 모든 민족들이 부여하고 있는 도전과 기회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거대한 경제블록이 형성되고 있는 이 시대적 조류속에서 이 지역 국가들이 낙후되지 않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나라들간에 협력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단위의 소승적 이익추구가 과거처럼 절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유럽과 미주가 블록화를 지향하면 이에대한 대응은 아시아 국가들도 공동이익을 위해 서로간의 독자적 이익을 상호 절충해 나가는 일이다.
노대통령의 이번 방일이 그와같은 인식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면 한일관계에 뜻깊은 전기가 마련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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