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박두진 김춘수 원로시인들 작품활동 "재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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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문학평론가 이남호 씨는 80년대 시단의 특성을 살핀 한 평론에서 전반기는「아버지 축출의 시대」, 후반기는 「편모 슬하에서의 시쓰기 시대」라고 이름지었었다.
광주의 5월로 열린 80년대의 참상을 불렀거나, 막지 못한 기성세대·권위 등에·대한 단죄의 한 방법으로 80년대 등장한 시인들이 형식면에서 시의기존양식을 파괴하면서 내용 면에서는 「아버지」를 공격, 축출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문단에 상당히 설득력있게 퍼진 명명이다.
「아버지」는 기존질서의 한 상징이며 문단으로 좁히면 곧바로 원로문인이 된다. 8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해체파」나「민중파」는 문단원로들을 그동안 가차없이 단죄했다.
그러나 80년대 시단으로부터 축출당했거나 소외됐던 원로시인들이 90년대 들어 그들의 건재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최근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시단의 대표적 원로들은 서정주(76)·박두진(74)·김춘수(68)씨 등이다.
『세계의 문학』봄호에 세계 각국의 산들을 소재로 한 「산시」20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한 서정주 씨는 이미 산시 1백20편 가량을 완성, 7월초 민음사에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낼 예정이다.
서씨는 이들 산시에서 세계 각국 명산」의 이름을 매개하여 그 나라의 설화나 민속·민족성 등을 서씨 특유의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으로 그리고있다.
그의 산시는 대부분이 의미적 요소보다는 음성적 요소에 의해 상상력이 발동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과 이상, 사상과 정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견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박두진씨도 최근 신작시집 『빙벽을 깬다』(신원문화사간)를 내놓았다.
『별의 하늘 멀리까지 올라가보렴. /풀섶에 떨어져 반짝이는/어릴 때 어머님의 다리밋불 불티로/호롱호롱 파랗게 혼령처럼 타는/-삡법 뻐, 삡법뻐/그 때처럼 반기나/손바닥에 작은 불빛 너무 차가워/별을 보고 너를 보고 눈물 젖는다./오랜만에 아무도 몰래 눈물 젖는다. 』 (『개똥벌레불』전문).
하늘 높이 비상하지 못하고 풀섶에 떨어진 반딧불을 손에 올려놓고 노시인은 눈물짓는다. 이 눈물은 박씨가 추구하고있는 절대순수의 종교적 세계와 인간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 유시욱 씨는 이러한 박씨의 시 세계를『절대 유일신에 귀의하려는 이상과 자유의지의 실천적 차원에서 현실상황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균형을 이뤄 장엄하면서도 생동하는 탄력을 잃지 않고 있다』고 평하고있다.
김춘수씨는 10여년 만에 연작시 「처용단장」3부를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하며 본격적으로 시작활동을 재개했다.
하찮은 역신에 아내를 빼앗기고 그 아픔을 체념과 춤으로 달랜 처용설화에서 제목을 딴 이 시는 때문에 김씨의 말대로『운명과 싸우는 비장한 태도보다 운명을 수용하는 해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내를 빼앗아가는 것보다 더 큰 폭력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폭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최대의 관심거리라는 김씨는 3부 초반부에 「여순감옥」 「요코하마헌병대」 「세다가」 「야서」등 그가 청년기에 겪은 일제의 제도적 탄압기관을 시어로 사용하며 1부에서 나온 유년기의 무의식적 이미지를 구축해내고 있다.
「완전과 영원을 꿈꾸며 불완전과 역사를 아프게 무시」하며 시에서 현실의 그림자까지 완전히 추방해버린 2부의「무의미시」에서「폭력은 곧 역사다」며 역사, 현실에 눈을 돌려 이것과 무의식적 이미지를 융합해 가는 김씨의 「처용단장 3부」작업은 우리 시사의 한 지평을 열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씨는 『현대시학』5월호에 실린 시론에서 『시에 있어 리얼리즘은 어부성세』이라며 『시는 사회의 편에 서지말고 인간·개인의 편에 서야한다』는「인본주의 시론」을 내세운다.
이런 김씨의 인본주의 시론은 아직 80년대 문인들로부터『철지난 인문주의자들의 노귀를 경계한다』(문학평론가 이윤택)는 등의 견제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아버지 부재의 시단」때문에 속이 텅빈 채 갈 곳 없이 거리를 방황하거나 아예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퇴영적 시의 극복을 위해 시적 실험을 거듭, 한국현대시사에서 나름의 일가를 이루고 있는 원로시인들의 시세계도 이제 받아들여져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반성도 진지하게 일고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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