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부곡인은 천민 아닌 양민〃|국민대 박종기교수, 기존통설 반박한 논문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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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려시대를 특징 지우는 독특한 신분집단인 향·소·부곡주민이「천민」이었다는 기존의 통설을 반박, 이들이 특수한 역할을 수행한「양민」이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있다.
박종기 교수 (국민대) 는17일 국사편찬위원회주최로 열릴「고려시대의 신분제」에 관한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논문「고려 부곡인의 신분과 신분제도운영원리」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향·소·부곡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수한 물품생산 등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행정단위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곳에 살던 사람들(통칭부곡인)은 군현지역에 살던 양민(주로농민)과 구분되는 천민으로 분류해왔다.
그러나 박교수는 이 같은 통설을『부곡인의 존재를 신분제적 차이로 보는데서 온 오류』라고 지적하고, 『부곡인은 보통 농민과 달리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물품생산이라는 추가부담을 지는 사회적 역할의 차이는 있으나 천민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교수가 제시한 반박논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부곡인을 천민으로 보아온 근거는▲중국과 일본의「부곡」이 사속천민(노비)이었다는 점▲사적 유물논의 관점에 따라 고대노예제사회의 주요지표로 부곡집단을 설정▲고려사 등에서 나타나는 부곡인에 대한 차별조항 (과거응시·국학입학금지 등)이었다.
그러나 중국·일본의 예를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 사적 유물론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부곡인을 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부곡인은 중·일의 사노비와 달리 개인이나 국가기관에 소속돼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반양민들과 같이 독립해 생활하며 국가에 대한 조세의무를 부담했기 때문이다. 부곡인을 천민으로 규정하는 실증적 근거가 되었던 각종 규제조항도 오히려 그들이 양민이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과거응시에 대한 금지규정으로 고려사에서 「오역오적부충\효향부곡잡류····물허부거‥‥」가 있다. 기존에는 「오역, 오적 등과 함께 부곡인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해석해 부곡인의 차별대우조항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부곡인 출신이 관리로 진출한 기록들이 많고 잡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과거응시가 법적으로 보강돼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조항은『역적의 죄를 범하거나 부충·부효한 부곡인과 잡류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
또 「부곡인과 일반농민(군현인)이 결혼해 낳은 자손은 부곡인으로 규정한다」는 고려사의 조항도 부곡인의 차별을 보여주기보다 부곡인이 양민임을 반증해준다. 즉 당시 양민과 천민의 결혼은 금지되어있었는데 부곡인과 일반농민의 결혼을 법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점은 부곡인이 양민범주에 속함을 알게 해준다.
더불어 부곡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한 것도 신분차별이라기보다는「특산물 생산에 종사하는 인력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지조항은 향리나 율역인(나루터나 역을 운영하는 사람) 들에게도 적용된다.
결국 부곡인은 양민에 속하면서도 일반농민인 군현인보다 사회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었으며 이러한 부곡인의 존재는 고려시대의 가장 독특한 신분제라 할 수 있다.

<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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