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유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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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록속에 연휴를 맞는다. 세상은 너절하고 심란해도,자연을 느끼는 감동은 따로 있다. 오늘같은 날은 어두운 마음 훌훌 다 털어 버리고 어디 숲길이라도 걷고 싶다. 가까이에선 매일마다 화려한 새옷을 갈아입는 가로수들만 봐도 생명의 기쁨을 확인할 수 있다.
무심코 동네 골목길을 지나갈 때 어디서 문득 스며오는 꽃향기… 어느집 담너머로 고개를 내민 라일락은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청초하고 아름답다. 연보라빛의 라일락도 있다. 추위와 숨막히는 공기와 인색한 햇볕과 모진 바람속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신비한 빛깔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인가. 자연은 항상 너그럽고,사랑스럽고,따뜻하다.
『…이 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른 속닢들 저리 부드러웁고/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접힌 마음,구긴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럽게 만드오…』
우리의 서정시인 김영랑은 「찬엄한 햇살 퍼져오는」 5월을 이렇게 노래했었다.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 고함소리들,핏발 선 얼굴들,질주하는 발걸음 소리,얼굴 두꺼운 정치인들,증권시장의 한숨소리,기계 멎은 공장의 음산함… 저 신록의 자연속엔 그런 것이 없어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런 자연을 잃은 지 오래다. 봄되면 3월 새학기가 두럽고,3월 지나면 4월이 불안하고,5월이 오면 계절의 여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5월 걱정이 기다리고 있다.
꽃은 혼자 피고 지고,신록은 혼자 자라고,부드러운 바람도 혼자 설렁거리는 것이 우리의 봄이고,자연이고,생활환경이다. 그런 나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꽃이 마냥 핀/이 지랄같은 봄을/나는 시방/아득한 설원을 달린다』는 참담한 느낌은 시인 신석정만의 심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시인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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