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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유탄' 맞은 최철한 9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중국의 동북공정이 바둑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선 한국 바둑 자랑이 넘쳤다. 한국에 번번이 패하는 '공한증(恐韓症)'의 중국 기사들을 동정하고 격려하는 글도 가끔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요즘엔 중국에 패배했다가는 곧장 뭇매를 맞게 된다. 가뜩이나 중국이 강해져 한국 전유물이었던 우승을 낚아채 가는 데다 언론에 동북공정이 집중 보도되면서 중국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베이징(北京)의 농심신라면배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최철한 9단이 그 케이스. 한국 팀은 조훈현 9단이 일본의 하네 나오키(羽根直樹) 9단에게 패배한데 이어 최철한마저 중국의 펑취안(彭) 7단에게 패배하며 1승도 건지지 못한 채 두 선수가 탈락했다. 그 내용이 인터넷에 뜨자마자 즉시 공격적인 댓글들이 줄을 이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창호 9단은 잘 꺾으면서 왜 중국 기사에겐 사족을 못 쓰나. 국내용이 아닌가 등 입에 담지 못할 표현까지 섞어가며 최 9단을 질타했다. 이에 대한 반박과 "힘내라"는 격려는 한쪽으로 밀리는 분위기였다.

농심배는 한국이 여섯 번 연속 우승하다가 지난해 한 번 준우승했으니 그동안 너무 잘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기사에게 한 판 졌다고 해서 한국 4천왕의 한 사람인 최철한이란 대표기사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둑팬들이 이처럼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패배로 인해 가장 가슴아픈 사람은 최철한 본인일텐데 아무리 동북공정의 유탄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더구나 최철한은 불과 얼마 전에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에서 중국랭킹 1위 구리(古力) 9단을 격파했지 않은가.

최철한 9단은 올해 겨우 스물한살의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다. 사람들이 그의 바둑 스타일만 보고 '독사'라는 별명을 붙여놓았지만 나는 그가 독사와는 삼천리쯤 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부드러운 심성을 지녔고 어린 나이에도 타인을 배려하는 무던한 마음은 종종 감탄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운명적으로 바둑과 만났고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며 불과 열여섯살 무렵부터 무수한 업적을 이뤄 왔다. 그럼에도 늘 수줍고 겸손하다.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 모습이 때론 적막해 보이기도 한다.

그는 더 커야 한다. 한 걸음 더 자라 이창호가 이룩한 '무적 한국'을 다시 일궈내야 한다. 성장을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최철한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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