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일본 "현행 헌법은 승전국에 바친 반성문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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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도쿄의 한 호텔에서 아베 신조 차기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한 가족들. 왼쪽부터 아베 차기 총리의 어머니 요코, 형 히로노부(현재 미쓰비시상사 근무), 본인, 부인 아키에.

"현행 헌법의 전문(前文)은 패전국이 승전국(연합국)에 바친 반성문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주권국가라 할 수 있다."

26일 일본 총리에 취임할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의 지론이다. 일본 헌법에 세계 어느 주권국가에서도 유례가 없는 '군대 보유 금지' 조항(9조)이 만들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서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 휘하의 장교들이 초안을 만들었다. 이는 전범 국가인 일본의 재무장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본의 우파들이 '강요된 헌법'이라고 주장하는 연유다. 아베는 헌법 개정이란 용어 대신 아예 '신헌법 제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내심으론 현행 평화헌법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1954년 자위대 창설 이후 9조는 끊임없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일본 정부는 헌법 조문은 그대로 두면서도 해석을 달리하는 이른바 '해석 개헌'을 통해 현실과의 괴리를 메워 왔다. "전쟁은 포기하지만 자위를 위한 항쟁은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소한도의 자위력은 위헌이 아니다"라는 논리다.

그렇지만 해석 개헌에도 한계가 있다. 이지스함 등 각종 첨단장비로 무장한 자위대지만 방어형 위주의 무기체계로 한정돼 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공격 능력을 제한해 만드는 자위대의 항공기가 좋은 예다. 자위대의 무력 행사에도 엄격한 조건이 붙어 먼저 공격받지 않는 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없다.

아베는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테러리스트의 배가 도쿄 앞바다에 나타난 경우에도 먼저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력으로 쫓아낼 수 없다"는 식의 극한 상황을 가정하며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평화헌법 개정은 45년 이후 일본이 걸어온 국가 노선, 즉 '경(輕)무장' '경제 우선주의'의 공식 폐기를 의미한다. 더구나 아베는 신념에 찬 군사력 강화론자다. 그는 "규모만 소형이라면 일본이 원자폭탄을 보유하는 것도 괜찮다"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해 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먼저 미사일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 확보도 검토해 봐야 한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매년 두 자릿수로 늘어나는 중국의 군사 예산 증액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일본의 군비 강화를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벽은 있다. 일본 헌법은 세계적으로도 개정 요건이 가장 엄격한 축에 속한다. 중의원.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만 개헌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그러나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9조 개정에 반대하고 있고 제1야당인 민주당도 자민당 주도의 개헌에는 협력할 가능성이 작다. 아베가 "개헌 추진은 5년 가까운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어려움을 감안한 것이다.

개헌에 가장 큰 변수인 국민 여론은 점점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다. 젊은 층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늘 개헌 찬성 비율이 높다. 민주당 내 소장파 의원들은 자민당 못지않게 안보강화론을 주장한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개헌론자들이 힘을 얻을 전망이다. 다만 아베의 계획대로 5년 내에 실현될 것이냐가 문제다. 그 1차 관문은 내년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다. 현재로선 어려운 선거가 될 것이란 예상이 많지만 만약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게 되면 개헌 일정은 크게 앞당겨질 수 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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