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중고폰 장롱 속 낮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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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경기도의 한 중고 휴대전화기(중고폰) 수출회사의 재고 창고. 올해 초까지만 해도 중고폰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20여 명의 직원은 손을 놓고 있었다. 성능을 체크해 수출용으로 분류할 중고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직원은 "단말기 유통망을 잡고 있는 이동통신 업계가 최근 중고폰 수거를 제대로 안해 우리 같은 회사는 부도날 위기"라고 말했다. 이 회사 매출은 올해 초까지는 매달 5억~6억원이었으나, 단말기 보조금 제도가 부활한 올 3월 말 이후 뚝 떨어져 이달엔 1억원에도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

한 해 500억원 규모의 중고폰 수출이 중단될 위기다. 멀쩡한 중고폰이 가정의 장롱 속에 방치되거나 길거리에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고객에게 중고폰을 회수한 뒤 수출대행사에 넘겨왔던 이동통신 업체가 이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18일 정보통신부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 홍창선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이동통신 3사에서 발생한 중고폰(추정)은 625만 대로 지난 한해(1193만 대)의 절반을 넘었다. 반면 이 중 이동통신 업계가 수거한 중고폰은 올 상반기 111만 대로 지난해(328만 대)의 33%에 머물렀다.

홍 의원은 "정부가 단말기 보조금을 허용한 3월 말 이후부터 중고폰 수거량이 대폭 줄었다"고 지적했다. 이동통신 3사는 그 전까지 '중고폰 모으기' 캠페인을 벌였다. 신규 가입자를 모으려고 중고폰을 가져오는 고객에게 보조금을 편법으로 많이 줬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보조금을 법적으로 풀자 이동통신 업계가 캠페인을 슬그머니 줄이거나 중단했다.

중고폰 수출업계에 따르면 이동통신 회사마다 3월까지는 매달 10만~20만 대의 중고폰을 수거했다. 그러나 4월부터 수거량이 급감하면서 이달에는 업체별로 월 5000~2만 대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보조금 부활로 멀쩡한 중고폰은 더 많이 나오지만 수거량은 오히려 줄고 있는 것이다.

홍 의원은 "중고폰은 대당 5000원에서 2만원까지 수출된다"며 "매년 발생하는 중고폰 중에서 절반가량은 수출이 가능한 제품이고, 대당 1만원에 팔 경우 500억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마구 버려지는 단말기로 인해 환경오염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단말기 한 대에는 신경계.간 등을 손상시키는 납이 보통 0.1g 들어 있다. 카드뮴.비소.수은 등 인체에 해로운 물질도 있다.

정통부 관계자는 "이동통신 업계에 중고폰 수거를 강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중고폰 수출업계 관계자는 "중고폰을 재활용해 수출할 수 있는데도 길거리에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이동통신 3사가 중고폰을 가져오는 가입자에게 보조금을 더 주는 방법 등 중고폰 재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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