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교육의 새장 여는 청신호/인문계 취업반의 열기를 보면서(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공부에 소질도 없는데 대학만 쳐다보고 있으면 뭐하겠어요. 직업학교에 들어온 뒤론 하루 하루가 즐겁습니다.』
인문계 고3취업반에 들어간 한 학생의 밝은 목소리는 왜곡된 학교 교육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는 청신한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서울시내 인문계 고교 3학년에 적을 둔 2천3백여명의 학생들이 2개의 직업학교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직업교육을 받고 있는 보람찬 현장을 소개한 어제 중앙일보 사회면 기사는 우리 교육의 당면한 모순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뜻밖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직업교육을 받겠다는 신청서를 학부모의 동의서를 첨부해 신청한 숫자가 5천여명에 달했고,주간의 수업을 마친 다음에 피곤한 몸으로 야간의 직업교육을 받으면서도 보람과 활력에 넘쳐 있다는 사실이 고교생 직업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능성은 비진학·미취업 청소년들의 오갈데 없는 현재 상황에 밝은 진로를 터주는 계기가 되면서 동시에 이상과열의 대입현상이 몰고온 학교 교육의 파행성을 시정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자는데 그 뜻이 있다.
30%미만의 학생을 상대로 대학 입학만을 목적으로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린 학교교육,막혀버린 진로 앞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는 청소년의 비행과 범죄의 증가,60만명에 달하는 재수생의 문제등이 해마다 사회문제로 제기되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게 작금의 상황이었다.
현행 교육제도에 대한 인식 전환의 조짐은 전문대의 취업률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문대 취업률 80%라는 숫자가 전문대의 위상을 바꾸게 했고 뒤이어 실업고 취업률의 증가와 함께 인문계 일변도의 선호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인문고교를 나와야 대학엘 가고,대학을 졸업해야 취업할 수 있다는 우리의 맹목적 교육관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는 시점에 오게된 것이다.
문교당국 또한 이러한 변화의 조짐에 맞춰 전문대의 신·증설을 대폭 허용하고 20만명을 더 수용할 수 있는 실업고의 증설계획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 변화의 조짐을 큰 추세로 몰아가기 위해선 다음 몇가지 사항이 연계적으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연차적으로 진행될 실업고의 신·증설 계획을 현재의 소극적인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인문·실업 비율 6대4를 역전시키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추진할 것을 당부하고 싶다.
물론 여기엔 실업고 선호도를 측정하는 보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조사가 뒤따라야겠지만 애초부터 예상치 않았던 인문계 취업반의 열도를 미뤄봐도 당초의 조심스런 접근이 실태파악에 미흡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 고3이 되어서야 취업반에 들어가 주간에 수업을 받고 피곤한 몸으로 야간취업교육을 받기 보다는 진로 결정을 그보다 앞선 단계에서 결정하는 쪽으로 정책이 전환되어야할 것이다.
둘째,대학을 못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타의로 직업교육을 받기 보다는 어려서부터 본인의 적성과 취향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직업교육이 되게끔 학교와 학부모가 공동 노력으로 인식을 바꾸는 노력이 폭넓게 확산되어야 한다.
자녀가 대학엘 가지 않더라도 사회적 차별없이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다는 사고의 대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셋째,그 인식의 전환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요인이 기업체의 적극적인 기능인력 흡수와 차별없는 대우문제다. 이 요인은 이미 밝혀진대로 고졸자의 4년근무 임금이 대졸자의 초임을 상회하기 시작했다는 지난해의 통계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지만 기업체의 근무환경 또한 사무직 우선·우대의 풍토에서 벗어나 능력과 기술 우위의 근무 환경으로 적극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와 기업체,학교와 학부모가 이같은 인식전환의 출발점에서 중등교육을 직업교육으로 강화하고 선호하는 쪽으로 노력할때 우리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는 서서히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길이 시험으로 병들어 가고있는 자녀를 살려내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유능한 기능인으로 흡수하면서 산업입국의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멀지만 빠른 길이 아니겠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