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수다 본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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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수다는 본능이다. 나는 그 사실을 얼마 전 우리 집에서 있었던 아내의 동료 모임에서 새삼 깨달았다.

아내의 동료들은 여자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면서 수다를 시작한 그들은 현관에 들어서서 과장 섞인 감탄과 인사를 나눌 때에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날 나는 가정적인 남편 모드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앞치마를 두른 채 아내 옆에 서서 가정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수다를 맞는다.

"어머, 앞치마 너무 잘 어울리신다."

"정말~. 난 앞치마 잘 어울리는 남자가 좋더라."

"남편분 넘 가정적이시다."

가정적인 남편이 얼굴만 붉히고 서있자 아내가 인사에 답한다.

"아냐. 이 사람 사회적인 남편이야."

그들은 우리 집으로 곧 이사 올 사람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그들의 수다는 안방과 아이들 방, 욕실과 베란다, 다용도실로 이어지며 쉬지 않고 흐른다. 한바탕 집에 대한 논평이 끝난 뒤 그들은 거실에 펴둔 상에 둘러앉아 수다를 이어간다.

수저를 놓고 술과 접시를 나르는 등 상차림을 도우면서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본다'. 여자들의 대화는 청각뿐 아니라 시각도 사용해 들어야 한다. 말할 때 그들이 짓는 섬세한 표정과 풍부한 제스처는 얼마나 다양하고 창의적인지 모른다.

여성은 말 잘하는 능력을 타고나는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은 자라면서 아침 저녁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집과 학교에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복도와 화장실에서, 커피숍과 식당과 술집에서 수다를 배우고 익힌다. 그러니 이런 자리에서도 수다는 멈추는 법이 없다.

"사회적인 남편분 좀 오시라 그래."

"그래, 저… 여기 좀 같이 앉으세요."

"아닙니다. 괜히 저 끼면 불편할 텐데요 뭐."

"안 오시는 게 더 불편한데요."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내외하니? 이리 와서 언니들에게 술도 좀 따르고 그래요."

오늘따라 아내의 웃는 모습이 사악해 보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술자리에 낀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한다. 도무지 낄 틈이 없다. 끼어들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리듬을 타지 못하고 그만 엉키고 만다.

"말씀이 통 없으시네요. 과묵하신가봐요?"

아니다. 나도 말 많다. 다만 말 못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대화를 연습해 볼 기회가 없다. 아니 남자 사이에는 대화 자체가 없다. 그저 지시나 연설이 있을 뿐이다. 남자들은 어떤 모임이든 서열을 짓는다. 넘버원이 있고 투가 있고 스리가 있다. 남자들 사이의 대화란 대개 마이크를 독차지한 넘버원의 연설이기 십상이다. 나머지는 넘버원의 말을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졸리기 때문이다.

늘 듣기만 하는 나는 점점 다리가 저려온다. 슬그머니 일어나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실이 조용하다. 손님들이 돌아간 모양이다. 모처럼 고요가 깃든 집에 평화가 찾아오는가 했더니 씩씩거리는 아내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온다.

"사람이 왜 그래요? 손님들하고 이야기도 안 하고 그 사람들 얼마나 불편했겠어?"

아내가 방문을 연다.

"당신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

글쎄, 난 남자야. 이야기하는 법을 모른다니까.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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