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낙엽, 가을의 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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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른 아침 마당을 쓸다가 문득 낙엽 하나 주워들고 바라봅니다. 핏기 없는 얼굴, 왠지 자꾸 손이 떨립니다. 누군가 밤새 눈물을 삼키며 써놓은 유서인 것만 같아서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해독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삶이 문득 두 손을 놓았을까요, 죽음이 덥석 두 손을 잡았을까요.

마당 가득 수많은 낙엽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편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성스레 책갈피에 끼우며, 나는 또 밤을 새워 답장을 쓰겠지요. 하지만 날마다 신문을 펼치면 생활고에 지친 어머니가 어린 아이와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카드 빚에 몰린 청춘들이 범죄를 꿈꾸거나 문신 새기듯 유서를 쓰고, 아무 대책도 없이 무서리가 내립니다.

이 아침에 나는 소지를 올리듯 한 잎 한 잎 낙엽을 태웁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괴로워하거나 노하지 마라'를 되뇌며, 자주 눈빛이 흔들리는 그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여여하시지요? 고개를 들어 잎 다 떨구고 단식의 겨울 수행을 준비하는 감나무를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낙엽은 가을의 유서가 아니라 봄의 약정서 같은 것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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