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피곤한 국민 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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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무현 대통령께서 아파트 옥상에 오르시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니들이 원하면 나 이 자리에서 점프해버린다!'…대통령께서는 '내가 그동안 참 칠칠치 못했다'고 반성하시었습니다. 하지만 '무지 섭섭하고 열받는 일도 많았다'고 털어놓으시었습니다. 아, 이 가을에 웬 꼬장입니까. 이런 이판사판식 경우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이 아파트값 잡을 때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갈 땝니까?…"(한겨레21, '노무현,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다')

"국민의 뜻은 무엇인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나 가장 대우 안해주면 이혼할래'하는 철부지 남편을 아이들 생각해서 '잘해보자'고 달래는 아내와 다름없다. 사랑도 없고, 신뢰도 없고, 희망도 없다. 다만 아이들이 클 때까지, 북핵부터 경제까지 이 위기를 넘기는 데 판만 깨지 말자는 뜻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박복한 팔자다. …"(조선닷컴 전여옥 칼럼, '기쁨 못준 대통령 물러나길')

그러나 기어이 盧대통령은 옥상에 올라가 국민을 향해 재신임과 이혼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한 지 8개월 만에 이혼을 무기로 국민을 협박하고 있는 꼴이다. 대통령이 됐다는 것은 사랑하는 국민과 5년 동안 결혼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맡겨진 기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때 盧대통령 장인의 좌익.부역활동 경력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장인이 좌익활동 한 것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받아쳐 세인을 감동시켰다. 거대 야당이 뒷다리를 잡고, 부패한 정치권이 환멸스럽더라도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국민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의 도덕적 잘못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라면 그건 더더욱 안될 말이다. 잘못이 있으면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일이지, 이혼을 무기로 면책받을 궁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르윈스키 스캔들'때문에 탄핵위기까지 몰렸다. 도덕적 명예는 땅에 떨어져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국민과의 이혼이라는 말은 뻥끗도 하지 않았고, 정해진 임기 동안 훌륭히 직무를 수행했다.

클린턴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하이눈'이다. 스무번 이상 봤다고 한다. 악당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보안관 윌 케인은 결혼을 위해 마을을 떠나려던 계획을 바꿔 마을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사면초가의 케인은 홀로 네명의 악당과 맞서 모두 물리치고 마을을 구한다. '하이눈'은 난세의 진정한 리더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盧대통령은 당장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자신이 뱉은 말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사임하는 편이 낫다.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그렇다고 큰 일 나지는 않을 것이다. 유고연방의 옛 구성원이었던 몬테네그로는 50%에 못 미치는 저조한 투표율 때문에 5개월 이상 대통령 없이 지냈지만 그래도 나라는 굴러갔다.

끝까지 국민에게 피곤한 선택을 강요한다면 침묵하는 다수의 엄청난 저항에 부닥칠 수 있다. "우리도 힘들어서 도저히 국민 노릇 못해먹겠다"고 나오면 어쩔 셈인가. 없던 일로 하면 체면은 깎이겠지만 그건 잠깐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마음 고쳐 먹고 제대로 책무를 다한다면 덮어질 수 있는 허물이다. 盧대통령은 어서 옥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한다면.

배명복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