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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과목수 너무 많다(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5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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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수교과 인문 26ㆍ자연 25개/외국의 두배 넘어 수박 겉핥기식 수업 자초
올해 K대 입시에 합격한 정모군(19)은 설날 연휴 마지막날인 1월28일 한달여 남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대학생」으로의 변신을 위해 고교시절의 책상을 정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교과서만 모두 24권에 참고서는 자그마치 84권.
언제 배웠는지 기억이 생소한 과목의 교과서도 끼여있는가 하면 지학ㆍ상업교과서는 아직도 말짱한 새 것으로 보관돼 있다. 이들 교과서는 정군의 대학입시 선택과목에서 제외된 과목들.
그러나 정군이 현재 보관중인 교과서 24권도 고교 3년동안 배운 교과서를 모두 갖춘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 문과계인 정군이 3년동안 지급받은 교과서는 모두 32권.
그동안 8권의 교과서가 분실된 셈이지만 입시과목 위주로 공부하다 보니 어느 과목의 과교서가 없어졌는지 분간이 안된다는 정군의 설명이다.
그동안 학교에서도 26개 과목에 30권이 넘는 교과서를 배웠지만 책가방의 부피만 불려놓았을 뿐 정작 비입시과목들은 구색맞추기로 푸대접 받는 기형적인 수업이 예사였다.
『어차피 당장 입시에도 안나오고 졸업후에도 별 쓸모 없는 교과목 시간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잃어 지루하게 종치기만을 기다리거나 아예 국ㆍ영ㆍ수 등 입시과목을 자습하기 일쑤였다』고 정군은 고교시절을 회상한다.
현재 우리나라 고교생들이 3년동안 배워야 할 교과목은 인문사회계가 26과목,자연계가 25과목.
이는 9개 교과목이 있는 미국의 뉴욕주 고교,영국의 12개,서독고교의 9개,프랑스의 14개 교과목에 비해 가위 세계 최고수준이다.
실제 올해 고교 1학년부터 적용되는 제5차 고교교육과정에서 인문사회계 학생이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은 국민윤리,국어독본,문학,작문,문법,국사,정치ㆍ경제,한국지리,세계사,사회ㆍ문화,세계지리,일반수학,수학Ⅰ,과학Ⅰ 또는 과학Ⅱ,체육,교련,음악,미술,한문,영어Ⅰ,영어Ⅱ,제2외국어,기술(남) 또는 가정(여),실업 등. 이밖에 교양선택으로 한과목을 이수해야 하고 특별활동도 해야하며 대학에서도 이미 자취를 감춘 교련까지 버젓이 필수과목으로 끼여있는 실정이다.
서울고 곽한철 교장은 『너무 교과목이 많다보니 심화학습은 커녕 일부과목은 수박 겉핥기식 수업으로 오히려 학습능률이 떨어지고 학생들에게 심리적 압박감만 안겨주는 요인도 있다』고 지적한다.
외국에 비해 필수과목수가 많을 뿐 아니라 이수단위와 학습내용량이 배당시간에 비해 과다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2중의 학습부담을 지우는 원인이 되고 있다.
김두정씨(한국교육개발원 교과서 국제비교연구실장)는 『외국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내용지도를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책한권의 내용ㆍ영역은 많으나 할당시간은 적어 심화학습이 불가능하고 학생자신의 능력이나 취미ㆍ적성이 배제된 채 관심없는 분야까지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학습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한 예로 수학의 경우 교과목 수가 우리와 비슷한 일본에서도 21.8%의 시간배당을 받고 있는데 한국은 7%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점은 교과목은 백화점식으로 벌여놓았으나 현행 입시제도와 맞물려 비입시과목은 제대로 정상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교교실의 파행적인 교과운영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나라가 고교필수과목에서 세계최고를 자랑(?)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한다는 동양적 전통사상과 함꼐 사회발전에 따라 학문의 영역이 세분화 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대학의 특정학과 육성책이나 교원 수급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방후 지금까지 5차례의 교과개편 때마다 과목수는 늘어나 백화점식 교과목이 됐다.
실제로 올해부터 시행되는 5차 고교 교육과정개정에서도 교육학ㆍ철학ㆍ논리학ㆍ심리학 등이 선택 필수과목으로 채택된 배경도 해당학과 대학생들의 끈질긴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교부 김상대 장학관은 『외국과 단순히 산술적인 비교를 할 때는 우리나라 교과목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학습량은 별 차이가 없다』고 밝히고 『그러나 교육계 전반의 여론을 수렴,학생들의 학습부담을 보다 줄이고 현재의 사회여건에 맞춰 고교교육의 내실화를 이루기 위해 전면적인 교과과정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해마다 누적되는 재수생 해소와 고교생들에 대한 직업ㆍ진로교육을 위해 서울사대부고와 전남사대부고 등 4개교를 실험연구학교로 지정,운영한 후 그 결과에 따라 92년도부터 94년까지 고교 교과서를 전면개편,94학년도부터 전고교를 대상으로 실시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문교부 관계자는 『실험고교에서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고교 교과개정작업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나 실험학교의 한 관계자는 『현 여건에서 인문계고교에서의 직업교육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진학반은 우수생이고 취업반은 열등생으로 잘못 인식하는 현실 때문에 앞으로 난관이 숱하게 가로놓여 있다』고 우려하면서 『실험학교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학부모ㆍ학생ㆍ교사의 인식전환과 협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선행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수술대 위에 오른 고교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고교의 참교육을 위한 새 모습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교육계의 진단이다.<정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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