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햇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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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햇빛'-이기인(1967~ )

브래지어를 말리는 시간

햇빛은 열심히 가슴으로 들어왔다

세월이 흐르면

어머니의 가슴은 주인 없는 봉분처럼 착하게 무너져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들통난 젖을 빨고 있을 것이다

애인의 까만 젖꼭지엔 입김을 불어넣을 것이다

빨랫줄에서 갑자기 브래지어를 본 죄, 세월이 흐르면

나도 시력을 잃을 것이다

햇빛은 열심히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가면서

상처를 말린다



빨랫줄을 보는 일은 민망한 일. 그러나 할 수 없이 바라보노라면 너나없이 서글픈 이력들이 펄럭인다. 더구나 '가슴'을 둘러싼 이야기는 더더욱 민망과 슬픔이 깊다. 우리네 여성은 가슴으로 사랑하고 또 아이들을 키우고 주인 없는 봉분처럼 무너져 달랠 길 없는 슬픔에 휩싸이지 않던가. 우리를 사랑과 함께 살아가게 하는 죄! 시력을 잃을 죄를 생각하니 슬픔이 빨래 더미 같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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