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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길 두번 갔다올뻔 했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일 자동차 또는 오토바이 경주용 레인이 가설된'태백준용서킷.

전규정씨가 코너링을 하고 있는 모습.


"섹스보다 희열 넘치고 마약보다 중독적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한 남자는 오토바이의 매력을 말초신경을 한껏 자극하는 몇마디로 압축했다.

만화영화 우뢰매를 연상시키는 복장.

"빠 ̄ ̄앙" 굉음을 내며 눈깜짝 할 사이, 일명 '숑카'라 불리는 경주용 오토바이들이 '슉,슉,슉' 지나간다. 속도에 대해 묻자 옆에 있던 엔지니어가 "250(km)쯤 나올걸요"라 말한다.

오토바이 한 대가 바람과 함께 도착했다. 마치 우뢰매같은 의상(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의 두툼한 점퍼)에 검은 장갑의 운전자가 헬멧을 벗는 순간 긴 머리를 묶은 오토바이의 주인이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저 사람이 좀전에 자빠질 듯' 오토바이와 함께 몸을 옆으로 뉘어 코너를 도는 '행오프(Hang Off)'를 한 그 사람이라구?'

사진을 보여주자 자신이 맞다며 안졸리나 카페에 사진을 올려달란다. 안젤리나 졸리의 열혈 팬이라 카페 이름을 그렇게 만들었단다. 아마추어지만 팬 카페도 있고 회원 수도 90명 정도 있다고 한다. 모터사이클 아마추어 레이싱 선수 전규정(37. 그래픽 디자이너)씨. 알고 보니 그는 여성 레이싱 선수로 이미 알려진 인물이었다. 금녀의 벽이 무너진 세상이니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다루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국내에서 1000cc 슈퍼바이크 유일한 여성선수로 활동중인 사람은 최윤례(29)씨 단 1명 뿐이다.

"어느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400여대 서 있는 광경을 봤어요. 번쩍번쩍 빛나는 할리를 본 순간 반해버렸지요. 나도 모르게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이후 실력이 급성장해 모터사이클연맹의 라이선스 테스트를 통과할 정도로 실력을 자랑한다. 취미로 시작한 오토바이가 지금은 주말마다 동호회사람들과 투어링을 나서는 게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마니아가 돼버렸다.

"터질듯한 굉음과 바람을 가르는 스피드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터져버리죠."

강습을 통해 처음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지 5년. 그녀 나이 32세 때였다. 누구나 30대에 접어들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20대는 자유롭게, 개성 것 지낼 수 있었으나 30대부터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굴레와 속박을 깨고 과감히 자신의 취미를 위해 모든 걸 걸었던 것이다. 대학(서울여대서양화과)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성실하게 공부했고, 차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뒤에는 미술학원과 유치원에서 미술강사를 했고, 그 뒤 디자인을 공부해 디자인회사에 취직했다.

"충실히 대학생활을 했고 직장도 열심히 다녔지만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왠지 우울했습니다. 서른 살이 되면서 문득 내가 인생에서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해봤어요. 아무것도 없었죠."

이 무렵 의사의 권유로 인라인스케이트 동호회에 가입했다. 어릴 적부터 남자형제들과 자라서 그런지 운동에는 소질이 있었다. 내친김에 사격, 승마, 스킨스쿠버,보드, 심지어는 킥복싱까지 운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오토바이도 이때 시작했다. 역동적인 일이 자신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매력이요? 바람을 가르는 짜릿함보다 저를 더 만족시키는 건 없죠. 오토바이를 타면서 후회 한번 안 했어요."

이런 스피드에 그는 저승사자에 생명을 저당잡힐 뻔할 적도 있었다.

"황천길 두 번 갔다올 뻔 했죠. 한번은 차 밑으로 들어가서 갈비뼈 7곳이 골절되었고 간(肝) 파열도 있었어요. 중환자실에 눈떴을때도 빨리 일어나서 타야 하는데...그 생각뿐이었죠."부상이 두려웠다면 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도전하지도 않았을 거라 했다.

3남 1녀의 외동딸인 만큼 당연히 부모님의 반대가 심한 건 불 보듯 뻔한 일. 포기할 수 없었다. 오토바이가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오토바이를 위해 산다고 했다.

"일하는 것도 돈을 벌어 오토바이에 투자하고, 밥을 먹는 것도 체력을 키워 타야 하니까…." 미혼인 그녀는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정형화된 삶의 시간표가 정해져 있지 않다. 결혼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고픈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 얘기를 많이 하죠. 나이에 걸맞은 행동, 나이에 걸맞은 생활…틀린 얘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나이 때문에 뭘 못한다'라는 말은 분명히 틀린 겁니다. 지금 내 나이와 상관없이 나는 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사는 것은 행복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전 행운아죠.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전 이 길을 갈 거예요." 다시 바람이 분다. 헬멧안에 긴 머리를 감추고 그녀는 R1200 바이크에 몸을 싣는다. 바람과 오토바이와 한몸이 된 그녀. 트랙으로 빨려갈듯이 사라진다. 바람처럼….

태백=이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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