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화물차 탔다?

중앙일보

입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시 화제의 인물이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다. 숨으면 숨는대로,나오면 나오는 대로 뉴스감이 된다. 7월5일 미사일 발사이후 한동안 숨었다고 미디어가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엔 베이징 행이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그가 베이징에 온다는 얘기가 북한뉴스 전문 인터넷 매체인 NK 데일리에 뜬 게 8월23일.이후 기자는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둥(丹東)에 있다는 '이유'로 매일 같이 그에 대해 탐문하고, 역사로 나가 눈으로 확인하는 일을 되풀이 했다.

김 위원장의 방중 날짜를 NK 데일리는 28일로 보도했고,그 날이 가까워 오니까 한국에서 이런 저런 연락이 오고,근거 희박한 설들이 제시되고, 단둥 현지인도 기자에게 묻거나 의견을 제시하는 등 상황이 복잡하게 됐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김위원장의 중국 방문이 있다해도 그걸 사전에 확인해주는 곳은 없을테니,사전에 아는 것은 어렵고 통과 직후라도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그 곳은 오직 단둥 기차역뿐이었다. 국경을 넘으면 반드시 여기서 의전행사를 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매일,수시로 단둥역을 오가며 '혹시 경찰이 더 나와 있나', '군인이 나와 있지는 않나'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김 위원장이 온다면 베이징의 사람도 영접을 위해 먼저 국경에 올 것이란 점도 체크의 대상이었다. 시커먼 관용차들이 줄지어 오가는 모습을 찾으려 했다. 한때 그런 차들이 목격됐다는 얘기가 있어 긴장했는데 그건 요녕성 관리들의 회의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한마디로 긴장을 놓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지난주말쯤, '29일 오전 방중'이란 설이 다시 등장했다. 사업차 북한을 자주 오가는 중국인이 평양서 고위 관계자로부터 들었다는 얘기였다. 지금까지 돌던 설가운데 가장 유력했다.

그래서 28일 밤부터 압록강 철교에 바로 붙어 있는 한 호텔의 높은 층에서 타사 동료 기자 한명과 밤 새워 살피기로 했다. 그 방에선 압록강 철교는 물론 신의주 북단까지 보였다. 북에서 나오는 기차라면 놓칠 수가 없는 곳이었다. 28일 오후 9시쯤부터 방에 앉아 철교와 신의주 쪽을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며 압록강 철교를 장식하는 장식등도 꺼지고 강은 어둠으로 깊게 덮여 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 28일 밤 11시 30분쯤, 신의주 역사가 돌연 밝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밝아서 "아 저거구나. 딱 걸렸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30분쯤 그러더니 불이 꺼지고 상황 끝이었다. 신의주와 철교는 더 깊은 어둠으로 빨려들어갔다. 박쥐한마리 날지 않았다. 밤새 그랬다. 아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철교,그리고 철교 주변에 아무런 경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택시는 계속 다녔고, 그 새벽에 데이트 하는 젊은 남녀도 있었다. 공안(경찰)이라곤 28일 밤 늦게, 두명이 강변에 나타나서 화물차를 단속하는 모습만 목격됐다. 고위 인물이 온다면 있어야할 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전의 경험으로 보면 특별열차는 반드시 새벽에 쏜살같이 철교를 통과한다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낭설이었구나하는 결론으로 점점 더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날이 밝아오면서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고 피곤이 밀려왔다.

그러다 새벽 6시쯤 됐을까. 선잠에 빠진 듯 했는데 갑자기 열차소리가 들렀다. 철교를 보니 기차가 거의 중국쪽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우중충한 화물 열차다. 후에 알아보니 16량짜리 화물열차였다. 그리고 상황 끝이다. 그날 , 그리고 그 다음날도 특이한 상황은 없었다. 단동역에 근무하는 현지인은 "평소와 다른 게 아무 것도 없다"고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데 이 29일 상황을 놓고 '김위원장의 특별열차가 넘어왔다는 첩보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걸 받아들이면 '김 위원장이 화물열차를 타고 왔다'가 된다. 아니면 '김 위원장이 화물 특별 열차를 타고 왔다'는 게 된다. 우습지 않은가.

또 '이미 김정일의 특별열차가 중국에 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국경을 통과했다면 그 전후로 반드시 나타났어야 했던 징후들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추정컨대 화물차 통과가 정부의 첩보망에 잡혔고 그게 ◇보고 과정에서 증폭된 다음, 언론에 의해 '사실에 가까운 팩트'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기자도 '중국인 소식통을 통해 전해진 김위원장의 29일 방중설'을 보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확인을 거듭해서 분명해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워낙 '신비한' 인물이라 늘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도 제대로 정보가 확인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설을 크게 보도하는' 무책임한 수준이 돼서야 곤란하다. 현장에선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게 된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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