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기의 휴먼골프 <19> 이어령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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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로 사냥하는 벽화를 떠올려 보세요. 한국인의 순발력과 집중력이 탁월한 거죠." 얼마 전 이어령 교수와 서원밸리CC에서 함께 라운드했다. 첫 번째로 물어본 것은 "한국인이 왜 이렇게 골프를 잘하나"였다. "고구려 벽화를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교수는 탁구.야구.골프처럼 작은 공으로 하는 스포츠는 순발력과 집중력, 그리고 섬세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다 잘할 수 있는 종목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원래 유목민족이라 동적(動的)인데 유교문화 때문에 정적(靜的)으로 살아오다가 21세기 들어와서 다시 동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골프를 좋아하는 것도 푸른 벌판(필드)을 내달리던 유전인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여가문화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펼쳐 보였다. 그는 공해에 찌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이런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잠깐잠깐 노는 것으로는 풀리지 않고 몇 시간씩 흠뻑 뛰놀아야 풀린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가 골프를 시작한 사연도 재미있다. 1979년 신문에 소설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과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탈진하는 듯한 증상이 나타났고, 의사가 정밀진단을 해 봐도 무슨 병인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때 의사가 추천한 것이 골프였다고 한다.

"골프를 시작한 후 병이 감쪽같이 나았어요. 그때까지는 신문 칼럼에다 골프 치는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었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그 후에 소설가 최인호씨가 신문 연재 중에 똑같은 증상이 생겨서 고생한다기에 골프장으로 끌어냈더니 바로 병이 낫더라고요. 골프는 분명히 치료효과가 있습니다."

구력이 벌써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 교수는 한때는 싱글도 해 봤지만 지금은 보기 플레이어 수준이라고 했다. 이날은 91타를 쳤다.

그동안 골프 치면서 좋았던 점을 물어봤다. 첫째는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고, 둘째는 여러 사람을 사귀면서 다른 직업을 이해하는 학습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비교문화론에 박식한 이 교수에게 우리나라 골프문화의 특징을 물어봤다.

"골프장 그늘집은 우리나라가 최고죠. 그리고 클럽하우스에서 골프숍 대신 레스토랑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도 독특한 문화죠. 심지어 골프장 근처에 식당들이 즐비한데, 다른 나라에는 없는 문화 아닙니까."

그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같이 먹는 것'이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고 같이 먹으면서 동일한 커뮤니티에 편입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운동만 하고 그냥 떠나면 친해지지가 않습니다. 같이 탕 안에서 이야기하고 맥주 한잔 하고 식사를 같이해야 한국식 라운드가 끝나는 거죠."

이 교수는 최근 발간한 '디지로그'라는 책에서 한국인은 무엇이든지 '먹으면서' 문화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썼다. 나이 먹는다, 마음먹는다, 욕먹는다, 한 골 먹는다, 겁먹는다, 돈 먹는다 등등.

그래서 홍수환 선수가 4전5기로 이기고 나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할 때 더 열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골프는 18홀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모두가 홀딱 벗고 만나는 목욕탕이 19홀이고 식사가 20홀이다. 그러나 이날 라운드는 결국 21홀로 완성되었다. 바로 명강의였다.

오늘의 원 포인트 레슨=골프장은 18홀 플러스 알파가 있다.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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