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386을 옹호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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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양천구 신월3동 주택가의 한 건물 3층에 '가람상사'라는 가내공장이 있다. 30평 넓이에 컴퓨터 미싱.프레스기.세팅기(가죽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는 기계).스카이빙(가죽을 얇게 깎아주는 기계)들이 들어차 있다. 정식 직원은 사장 김양희(44)씨를 포함해 두 명. 일감이 많을 때는 임시직을 고용한다.

가람상사는 지난 한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김 사장 등 일꾼 8명이 오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 일했다. 어제 드디어 작업이 끝났다. 일본에 수출할 휴대전화 액세서리와 팔찌 10만 개를 박스 170개에 채워 내보냈다. 개당 1000원에 납품한 액세서리는 일본에서 1200엔(약 1만원)에 팔리게 된다.

가람상사의 풍경에서 먹물 냄새를 풍기는 것은 상호인 '가람'이 강(江)의 옛말이라는 정도다. 이 공장을 17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씨는 동네에서 '미싱사 시다(보조직)로 시작해 자기 공장을 차린 또순이'로 통한다.

이화여대에 다니던 시절, 광원(鑛員)이던 김씨의 부친은 "우리 광산에 광원이 800명이나 되지만 이대 다니는 딸을 둔 사람은 나 혼자"라고 뽐내며 다녔다. 대학 3학년이던 1983년, 김씨는 운동권 동료들이 하던 대로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에 처음 위장취업했다. 전자회사.봉제회사.가방공장으로 '공순이' 경력이 이어졌다. 노조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부친은 딸이 공장에 다니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흘간 곡기를 끊었다. 김씨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울며 호소했다.

김씨는 민주화가 진전되던 1990년 지금의 공장을 차려 독립했다. 위장취업 때 배운 기술이 바탕이 됐다. 독재정권은 교사가 꿈이던 김씨를 영세 제조업자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386 운동권 세대의 굴곡진 인생 역정에서 김 사장의 사례가 특별히 유별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저세상에 간 이들부터 반신불수가 된 사람,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 출가해 스님이 된 사람,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까지 필자가 직.간접으로 아는 사례만 꼽더라도 각양각색이다. 90년대 후반 '30대 나이, 80년대 대학입학, 60년대 출생'이라는 의미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386세대는 지금 만 37~46세의 나이가 되었다. 인구로 따져도 820만 명이 넘으니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중추세력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교수가 3년 전 펴낸 '386세대, 그 빛과 그늘'은 386세대의 대학시절과 그 이후를 분석한 흥미로운 저작물이다. 한 교수는 81~89년 사이에 자신의 '사회학 개론'을 수강한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의 변화와 가치관 형성에 관한 리포트를 내도록 했다. 십수 년 후 선별한 리포트 34편에 일부 졸업생과의 심층 인터뷰를 묶어 이 책을 펴냈다. 한 교수는 책 서문에서 "386세대는 민주화에의 헌신, 탈인습적 가치관, 지식정보화의 선두주자 성격으로 인해 21세기를 이끌어갈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에너지"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그는 경고했다. "권력은 항상 자만과 타성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386세대의 상징을 또 하나의 별것 아닌 권력의 이미지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요즘 자주 구설에 오르는 386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나는 정계의 386이 전체 386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발치에 엄청난 양의 피가 고여 있다는 사실을 항상 되새겨야 마땅하다. 옹호하고 싶은 쪽은 이제 중년을 맞이한 각계각층의 386이다.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대학시절의 '초심'을 잊지 말라고. 김양희 사장도 "젊을 때 나라와 이웃에 대해 남들보다 많이 고민했다면 나이 들어서도 제대로 살려고 노력해야지요"라고 말했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