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첫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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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산 아래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저 높은 산정엔 첫눈이 오셨답니다. 모두들 첫사랑의 추억에 잠시 일손을 놓았겠지요. 지난 여름 수줍은 소녀처럼 봉숭아물을 들인 그대의 새끼손톱에도 불면의 초승달이 떠올랐는지요. 날마다 첫 마음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나 시절이 수상하니 계절마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온 산에 단풍이 불붙기도 전에 첫눈이 내리더니, 경상남도에선 화들짝 벚꽃이 피어나고 덩달아 아카시아꽃이며 목련꽃도 피었다지요. 그것 참, 혼돈의 나라에 혼돈의 가을입니다. 그렇다고 첫눈의 재신임을 묻고, 첫사랑의 재신임을 묻고, 철없이 피어난 꽃들에 굳이 재신임을 물어야겠는지요.

경남의 꽃들은 태풍 매미의 충격 때문에 피었다지요. 다행히도 절망의 꽃이 아니라 자연치유의 꽃이랍니다. 깊은 상처의 나무들이 계절마저 잊은 채 꽃을 피우듯이, 대통령의 자연치유는 배수진을 친 재신임 이전에 상생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지난 대선 TV광고에서 서민과 함께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결코 가식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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