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볼셰비키 혁명 속에도 X염색체가 숨어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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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문명이란 관점에서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다른 종과 별 차이가 없는 하나의 포유동물일 뿐이다.

특히 수정란 상태에서 남녀의 성(性)을 결정하는 아주 성(聖)스러운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똑같이 X와 Y의 두 염색체를 이용한다. 즉, X염색체끼리 한 쌍을 이룬 XX의 수정란은 여성이 되고 X염색체와 Y염색체가 쌍을 이룬 XY는 남성이 된다.

그런데 이질적인 조합인 XY 염색체를 가진 남성은 단 한 종류뿐인 X 염색체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달리 이를 대체하거나 수리할 '부품'이 없어 유전병을 고스란히 앓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XX 염색체를 가진 여성은 또 다른 X염색체가 있어 그런 병을 비켜갈 수 있다. 혈액응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혈우병이나 색맹 등이 남성에게만 생기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인류사에는 갖은 굴곡이 나타났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이 앓던 혈우병이 러시아.독일.스페인의 왕가로 퍼진 이야기가 좋은 예다. 빅토리아의 딸인 알렉산드리나는 할아버지의 손상된 X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들인 러시아 황태자 알렉시스에게 혈우병을 안겨준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비극은 로마노프 황가의 통치 태만과 무기력으로 이어지며 결국 볼셰비키 혁명을 부른다. 스페인 왕가도 혈우병으로 타격을 입어 국가가 내전으로 가는 상황에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성캐서린 대학의 임상해부학자인 지은이는 X염색체를 주인공으로 과학과 역사, 그리고 남녀의 문제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그려 나간다.

헤르만 헨킹이 1890년 X염색체를 발견한 뒤 이를 남아도는 염색체로 보고 여분(extra)을 뜻하는 X라는 이름을 붙였다든가, 태평양의 작은 섬 핀지랩의 주민 대부분이 색맹이 된 까닭,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에 잘 걸리는 이유, 일란성 쌍둥이는 왜 여자가 더 많은지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본 지은이의 결론은 간단하다. 남녀의 서로 다른 염색체 배열은 다른 생물학적 기능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보다 더 잘 낳고 자신들의 유전적 특질을 계속 물려주기 위해 진화, 발달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Y염색체는 우리의 성별(性別)을 결정하고 성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X염색체는 수천 가지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조절한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유전자는 서로 다를 뿐 우열은 없으며, 남녀는 서로 상반되지도 대항적이지도 않은 동반자 관계라는 게 지은이의 강조점이다.

재미와 정보가 잘 버무려진, 그러면서 생각거리가 있는 교양서를 찾는 이들에게 권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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