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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만 남긴 혈육 상봉 설레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낮에만 해도 헤어진 가족들의 얼굴을 그리며 꿈에도 그리던 고향 길을 걷는 기분에 가슴 부풀어 있었는데…』
21일 오후가 되면서 북측의 억지로 거의 타결됐던 남북 고향 방문단 교류가 다시 무산됐다는 소식에 이북 5도청·이산 가족 재회 추진위·대한 적십자사 등에 몰려들었던 실향민들은 실망과 허탈의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분노까지 터뜨렸다.
지난달 고향 방문단 참가 신청을 했던 황석해씨(61·평북 출신) 는 『뉴스를 듣고 북에 두고 온 동생들과 상봉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다』며 『북쪽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의 심정을 모른다해도 이럴 수가 있느냐.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라며 분개했다.
황씨와 함께 고향 방문 신청을 했던 박연두씨 (70·평북 출신)도 『북쪽 하늘 아래 살아 있을 아들 (49) 의 얼굴이 어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아들에게 줄 가족 사진과 선물까지 준비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21일 정오부터 4시간 동안 1백여통의 고향 방문단 참가 문의 전화가 빗발쳤던 서울 신당동 1천만 이산 가족 재회 추진위원회 사무실에는 협상 결렬 소식이 전해진 뒤 전화벨이 일시에 멈췄으며 곧이어 울분을 토로하는 전화로 바뀌었다.
재회 추진위 조동영 사무총장은 『북한이 「피바다」를 서울 한복판에서 공연하겠다는 논리는 우리 공연단이 평양에서 공산주의를 분쇄하자는 반공극을 공연하라는 것과 같다』며『동·서독도 해냈는데 다시 남북간의 높은 벽을 확인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날 대한 적십자사에도 당초 예상보다 고향 방문단 참가 인원이 많아져 인선 작업에 즐거운 고민까지 했으나 오후 4시쯤 판문점에서 회담 실패 소식이 날아들자 분위기는 갑자기 냉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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