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여권장사' 차라리 민간기업에 넘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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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가 여권 발급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민원인들이 큰 불편을 겪은 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불편이 언제 해소될 것이라는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여권 발급 수수료 징수로 정부가 벌어들이는 돈이 연간 수백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처럼 '짭짤한 장사'를 하면서도 문제를 방치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국민을 고객은커녕 '아랫것'으로 취급하는 고질적인 풍토가 버젓이 유지되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국민의 민원에 무책임하게 대응하는 것은 국민을 깔보는 전형적인 사례다. 수십 년 전 동사무소에서 민원서류 한 통 떼는 데도 급행료가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300달러 수준이고 사회 전체가 관 우위의 권위주의에 절어 있던 때다. 대한민국의 행정 서비스 수준이 그 시절로 후퇴한 느낌이다. 그러니 여당의 정책위의장이 흥분하지 않겠는가.

외교부와 기획예산처, 지방자치단체 등 여권 발급 업무 관련 기관들은 예산과 인력 타령, 시스템 미비 등 턱없는 핑계만 대고 있다. 생각해 보라. 어느 기업이 연간 수백억원씩 이익이 남는 사업을 이처럼 엉터리로 운영할 것인가. 그런 기업이 있다면 한순간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 것은 불문가지다.

국민은 인터넷 사전예약제를 실시한다, 발급기관을 늘린다며 뒤늦게 호들갑을 떠는 당국을 믿을 수 없다.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하고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문제가 발생한 뒤에도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6개월 이상 방치해온 당국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여권 발급 업무가 그토록 귀찮게만 느껴진다면 차라리 민간에 업무를 넘겨라. 당국은 보안 문제를 거론하지만 연간 수백억원씩 이익이 난다면 정부보다 몇 곱절 더 보안 잘 지켜가며 효율적으로 일을 해낼 기업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을 것이다. 이제라도 수습할 생각이 있다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방치한 책임자들 문책부터 하라. 더운 날씨에 며칠씩 고생한 국민들 분이라도 풀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