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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잘싸’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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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졌지만 잘 싸웠다’는 뜻의 ‘졌잘싸’는 도쿄 올림픽의 화두 같은 단어였다. 세계 4강 신화를 쓴 여자 배구, 육상과 수영에서 역대 한국 최고의 성적을 낸 우상혁(4등)·황선우(5등) 선수를 보며 사람들은 열광했다. 목에 메달이 없어도 후회 없는 얼굴에 “역시 MZ세대가 즐기는 올림픽은 다르다”는 세대론까지 더해지니 완벽한 드라마가 탄생했다. ‘졌잘싸’는 모두를 승자로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단어였다.

하지만 도쿄에서 돌아온 ‘졌잘싸’의 선수들이 마주한 현실은 마법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좋은 패배를 응원해도,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승자 독식이다. 세계 대회 중 올림픽만 유일하게 4~6위까지 연금 점수를 주지만, 동메달(40점)과 4등(8점)의 차이는 5배다. 금메달(90점)과 비교하면 11배에 달한다.

한국 신기록을 세운 우상혁과 황선우 선수는 각자가 속한 체육협회에서 1000~2000만원의 포상금을 받지만, 병역 혜택과 아파트 특공 자격은 꿈도 못 꾼다. 단 몇 초와 몇 걸음의 차이로 선수들의 인생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진다. ‘졌잘싸’를 ‘졌잘싸’라 부르기 어려운 이유다.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높이뛰기 최고의 성적을 거둔 우상혁 선수가 활짝 웃고 있다. 그는 4등을 했다. [뉴시스]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높이뛰기 최고의 성적을 거둔 우상혁 선수가 활짝 웃고 있다. 그는 4등을 했다. [뉴시스]

승부의 세계란 냉정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한국 사회의 많은 것이 이런 승부와 같다는 것이다. 승자는 올림픽과 같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

“패배도 응원한다”는 MZ세대가 마주한 취업 전선은 스포츠 기록이 시험 점수로만 바뀌었을 뿐, 그 치열함에선 큰 차이가 없다.

만 서른에 군 제대를 앞두고 기자 시험을 준비했던 과거의 나는 “여기서 떨어지면 끝”이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친구들을 보며 패자 부활전은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5년마다 장이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같은 당의 후보들이 서로를 헐뜯으며 떨어뜨리려 하고, 수많은 사람이 별 대가 없이 대선 후보 캠프에 들어가 일을 해주는 것도,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현실을 잘 알아서다.

그래서 TV를 볼 땐 ‘졌잘싸’의 선수를 위해 손뼉을 치지만, TV를 끄고 현실을 마주하면 나는 ‘졌잘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올림픽을 보며 졌지만 잘 싸워준 선수들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졌잘싸들을 위한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졌잘싸’에 열광했던 건 그들과 비슷한 심정이라 그랬던 건 아닐까. ‘패배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괜찮다’는 마음. 승리가 최고라 말하는 현실에서 흔들렸던 마음을 기억하며 응원했던 것일지 모른다.

‘졌잘싸’를 위한 응원이 올림픽에서 끝나지 않기를, ‘졌잘싸’를 위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