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모델' 버렸더니 주가 3배…여심 잃은 빅시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2021.08.08 09:00

업데이트 2021.08.08 09:26

미국 속옷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은 과거 브랜드를 상징하던 '앤젤'과 결별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속옷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은 과거 브랜드를 상징하던 '앤젤'과 결별했다. AFP=연합뉴스

키 177.8cm, 몸무게 50.8kg, 허리둘레 24인치.
과거 미국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의 평균 신체 사이즈다. 몸집만큼 크고 화려한 날개를 달고 속옷 차림으로 런웨이에 등장해 ‘엔젤’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미란다 커, 켄달 제너, 바바라 팔빈, 지젤 번천, 하이디 클룸 등이 빅토리아 시크릿 엔젤 출신이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크릿은 브랜드의 상징인 엔젤과 결별하면서 오히려 재도약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가 지속되는 상황에도 지난 1분기 매출은 두배 늘었고, 영업이익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모기업 L브랜즈의 주가는 지난 1년간 3배 넘게 뛰었을 뿐 아니라, 빅토리아 시크릿의 분사 첫날인 4일(현지 시간) 주가는 장중 29% 상승을 기록했다.

날개 꺾인 빅토리아 시크릿 엔젤  

패션업계의 연례행사로 꼽히던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는 2018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AFP=연합뉴스

패션업계의 연례행사로 꼽히던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는 2018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AFP=연합뉴스

2~3년 전만해도 빅토리아 시크릿은 한물간 시대착오적인 브랜드로 여겨졌다. 여성의 성 상품화, 백인 중심 미의 기준, 그리고 비현실적인 몸매를 ‘완벽하다’고 표현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중심의 신생 속옷 브랜드는 ‘나는 엔젤이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통해 빅토리아 시크릿의 외모지상주의 가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미국 포브스는 2017년 “빅토리아 시크릿의 날개는 꺾였다”며 “젊은 여성들은 장식품 같은 화려한 속옷을 사느니 그 돈으로 신형 아이폰이나 운동복을 사길 원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실제로 시장조사기관 코어사이트 리서치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크릿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013년 31.7%에서 2018년 24%로 줄었다. L브랜즈의 주가도 2016년 70달러 선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지난해 10달러 선을 기록한 바 있다.

패션쇼 없애고, 모델 기준 바꿔  

현재 빅토리아 시크릿 홈페이지는 '엔젤'이 아닌 다양한 사이즈와 인종의 모델로 채워졌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현재 빅토리아 시크릿 홈페이지는 '엔젤'이 아닌 다양한 사이즈와 인종의 모델로 채워졌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추락하던 빅토리아 시크릿이 부활한 이유는 달라진 소비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새로운 브랜드로 재도약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엔젤의 패션쇼를 없앴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런웨이는 ‘패션계의 슈퍼볼’이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 1000만명이 지켜보는 연중행사로 꼽혔다. 저스틴 팀버레이크, 테일러 스위프트, 브루노 마스 등 당대 최고의 가수와 협업한 무대는 매년 화제를 낳았지만, 점점 시청률은 떨어졌고 결국 2018년 폐지됐다.

무엇보다 과거 엔젤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모델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빅토리아 시크릿의 홍보 대사로 선정된 이들은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이자 동성애자, 브라질 출신의 성전환자(트랜스젠더), 수단 난민 출신 모델, 사진작가 겸 기자, 통통한 사이즈의 모델, 인도 출신 배우이자 정보기술(IT) 기업 투자자, 중국계 스키 선수 등이다. 날씬한 외모가 아니라 직업·경력·경험을 토대로 여성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남성이 원하는 속옷에서 벗어나라  

최근 빅토리아 시크릿이 발표한 홍보 대사는 외모가 아닌 경험과 경력, 커리어 등을 기준으로 선정됐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최근 빅토리아 시크릿이 발표한 홍보 대사는 외모가 아닌 경험과 경력, 커리어 등을 기준으로 선정됐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경영진도 갈아치웠다. 과거 남성 중심 이사회는 여성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됐다. 2019년 기준 11명 이사 가운데 여성은 2명뿐이었지만, 지난 6월 기준 7명 이사 중 6명이 여성이다. 이는 “늙은 남성이 경영하는 젊은 여성 속옷 회사”라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마틴 워터스 빅토리아 시크릿 최고경영자(CEO)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세상이 바뀌고 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남성이 원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뽕브라’ 대신 브라렛·스포츠 브라 

빅토리아 시크릿은 편안한 속옷 뿐 아니라 활동성이 좋은 애슬레저룩도 선보였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빅토리아 시크릿은 편안한 속옷 뿐 아니라 활동성이 좋은 애슬레저룩도 선보였다. 사진 빅토리아 시크릿

한때 미국 속옷업계를 주름잡던 빅토리아 시크릿의 변신은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자기 몸 긍정주의)에 따른 시대적 가치 변화를 나타낸다. 바디 포지티브란 몸이 완벽해야 아름답다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매를 긍정하자는 운동이다. 인위적으로 갈비뼈를 조여 가슴골을 만드는 푸시업 브라 대신 와이어와 패드 없이 홀겹으로 제작된 브라렛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속옷 업계도 바디 포지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코로나 이후 집콕 생활 증가와 더불어 편안함을 강조하는 속옷이 잘 팔리고 있다. 노와이어, 심리스 무봉제, 인견 소재, 트렁크 사각팬티 등 화려하진 않지만 착용자의 편안함을 가장 우선시하는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 평등을 지향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가치관이 패션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거 여성의 화려한 속옷은 이성에게 선택받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타인에 의해 좌우되는 삶을 지양하기 때문에 화려한 속옷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며 “타인이 아닌 자신을 만족시키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편안한 디자인·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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