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더 모닝'] '독립운동 한일전' 끝낼 때가 아닌가요?

중앙일보

입력 2021.08.06 08:18

업데이트 2021.08.06 08:27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팀이나 일본 선수를 상대로 한 스포츠 경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975년 유제두 선수가 일본의 와지마 코이치 선수를 이기고 세계 챔피언이 될 때의 중계 화면. [중앙포토]

1975년 유제두 선수가 일본의 와지마 코이치 선수를 이기고 세계 챔피언이 될 때의 중계 화면. [중앙포토]

‘7회에 접어들면서 한층 자신이 생긴 유 선수는 의기소침해진 챔피언 와지마 코이치에게 저돌적으로 달려들면서 강타를 퍼붓기 시작, 1분 23초에 드디어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레프트 훅을 와지마의 턱에 작렬시켜 그를 캔버스에 침몰시켰다. 이어 유 선수는 카운트 8에 일어선 와지마를 재차 가격, 두 번째 다운을 기록했다. 다시 일어선 와지마는 이미 인사불성, 2분 4초에 강력한 유 선수의 피니시 블로우인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또 다운, KO승이 유제두 선수에게 선언되었다. (중략) 북ㆍ꽹과리ㆍ징 등 한국 고유 악기와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에 나와 응원했던 교포들은 아리랑을 합창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75년 6월 9일 자, 유제두 선수의 복싱 세계 챔피언 등극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당시 시합을 기억하시는 분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같은 날 경향신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 칼럼이 실렸습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이웃인 한국과 일본, 그래서 어쩐지 늘 찜찜하기만 한 저들과 우리. 더군다나 오늘의 국제정세가 두 나라의 협조체제를 특히 요청하고 있는데도 고자세만으로 어조가 거칠어져 가는 일본이기에 유제두 선수의 그 통쾌한 펀치가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후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중략) 우리는 흔히 우리 것을 얕잡아보면서 남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와지마의 허상에 눌린 나머지 국내 관계자들은 거의 유제두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의 원정은 무척 외로운 길이었다. 스포츠는 국력의 연장이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의 기사(연합뉴스 1996년 3월 25일, ‘한일 자존심 대결, 투지에 달렸다’)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96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에 합류,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올림픽 축구가 오는 27일 밤 일본과 아시아 축구 정상을 놓고 결승전에서 한 차례 대결을 벌이게 됐다. (중략) 승패의 결정적 요인은 불굴의 투지. 비쇼베츠 감독은 “모든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투지다. 싸워 이기겠다는 강인함만이 한국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외국인 감독도 전술과 선수들의 능력이 아니라 투지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축구 시합에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고도 합니다.

그다음 해인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전에서 후반 41분에 터진 이민성 선수의 골로 한국팀이 일본팀에 앞서가자 한국 방송사의 캐스터가 “후지 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한국 시청자들은 그의 화끈한 멘트에 환호했습니다. 외국 방송에서 백두산이나 한라산이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면 일전을 불사할 태도를 보이는 우리 국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는 최근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일본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제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팀이 일본팀에 패배하자 국내 포털사이트 올림픽 응원 페이지에 한국 선수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쏟아져 해당 공간 중 일부가 폐쇄됐습니다. 실수한 선수에게 “반민족행위자”라는 말도 했습니다. 일본팀에 패배해 결국 결승 진출이 좌절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마치 나라와 민족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흥분하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제 좀 쿨하게 한일전을 대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일본에서는 배구 한일전에서 패배를 안긴 김연경 선수의 인기가 꽤 높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를 보시죠.

"욘사마에게 혼나고 싶어" 김연경 신드롬, 日 혐한까지 뚫었다

 "'아따 죽겄다=あたしのお粥調整した(나의 죽을 조정했다)'. 이 구글 번역 맞나요? 누가 좀 가르쳐주세요."

4일 밤 일본의 한 트위터 유저가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이날 오전 터키전을 마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김연경 선수가 "아따 죽겄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궁금해 번역기를 돌려봐도 이해가 안된단 겁니다. 한 한국 유저가 친절하게 답을 해 줍니다. "죽을만큼 힘들다는 뜻이에요."

도쿄올림픽 막판,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김연경 선수가 일본에서 '욘사마'라는 별명을 얻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2000년대 '겨울연가' 배용준의 별명을 이어받은 거죠. '욘사마'가 된 이유는 일본어로 '연경'이 '욘굥'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31일 한·일전에서 일본이 패했음에도 김연경은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랐고 일본어 해시태그(#キムヨンギョン)를 단 게시물 7000여개가 쏟아졌습니다.

한국과 터키의 8강전은 일본팀 출전 경기가 아님에도 이례적으로 일본 방송 TBS를 통해 생중계됐습니다. 해설자들은 "김연경!"을 수백번 외치며 "수퍼 에이스 김연경을 보유한 한국"이라거나 "10년 이상 한국을 이끈 레전드"라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일본팀의 8강 진출을 예상한 편성이었겠지만, 경기가 끝난 후 TBS 트위터 계정에는 "중계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이어졌죠.

경기 중 에너지 폭발하는 김연경의 모습은 '밈'(meme)이 되어 온라인을 휩쓸고 있습니다. 한·일전 경기 중 김연경이 이소영 선수에게 무언가 말하는 모습에 어울리는 대사를 덧붙이는 놀이는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댓글에는 "나도 욘사마에게 혼나고 싶다", "당황했을 때 연경 언니한테 진정하란 말을 듣고 싶어요" 등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하이큐' 주인공보다 더 '만화같은' 연경

김연경은 2009년부터 2년간 일본 여자배구단 JT마블러스에서 뛰었습니다. 당시 리그 꼴찌였던 팀이 김연경의 활약에 힘입어 창단 후 첫 우승이란 감격을 맛봤죠. '욘사마'라는 별명이 처음 생긴 것은 그때라고 합니다.

배구는 일본에서 야구나 축구만큼이나 인기 있는 종목이죠. 고등학교 배구팀이 참가하는 대회만 해도 '하루코'(춘계 고교 배구대회)와 '인터하이'(전국체전)가 있고, 각 대회 참가팀은 약 50개입니다. 일본의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지방자치단체)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팀들이니 실제 고교 배구팀만 수백팀에 달한다는 이야깁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 여자배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딴 후 달아올랐다가 서서히 식어가던 배구의 인기를 다시 올린 건 만화 '하이큐'였습니다.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뒤를 잇는 최고의 스포츠 만화로 2012년 연재가 시작돼 2020년 완결됐습니다. 단행본만 누계 5000만부가 팔려나간 '하이큐'의 인기 덕에 배구는 젊은층에게 다시 '핫한' 스포츠가 되었죠.

김연경 선수도 유튜브 채널 '식빵언니'에 '월클 배구 선수가 배구 만화 하이큐를 본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감상을 올리기도 했는데요. 리얼하게 그려진 애니메이션 속 경기 장면에 "이건 배구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만화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만화 주인공보다 더 '만화같은' 플레이와 스토리를 지닌 김연경 선수가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일본매체 '더 다이제스트'가 김연경의 활약을 '팔면육비(八面六臂·뛰어난 능력으로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수완을 발휘)'라 표현한 것을 보며 이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일본에서 방송했다하면 시청률 1위를 찍으며 십년째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시리즈 '닥터X-외과의 다이몬 미치코'의 주인공 다이몬입니다.

큰 키에 폭발하는 카리스마, 천재적인 실력, 넘치는 자신감을 갖춘 외과의 다이몬은 누가 걱정이라도 할라치면 이렇게 말하죠. "괜찮아. 나는 실패하지 않으니까." 그러고보니 천재 부동산업자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집을 파는 여자'의 주인공 산겐야도 비슷합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집을 팔아치우고 마는 그녀의 말버릇은 이것. "내가 팔지 못하는 집은 없습니다!"

일본에선 이처럼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크게 히트한 적이 많았죠. 일본 온라인 매체 제이캐스트는 ‘여자×고고함×대단한 실력'은 일본 드라마의 필승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리메이크 된 '여왕의 교실'에서부터 '파견의 품격(한국제목 '직장의 신')', '가정부 미타(한국제목 '수상한 가정부')' 등이 그 계보에 들어있죠.

김연경 덕에 혐한도 극복?
선진국치고 성별 격차가 극심한데다 여성들에게 고분고분한 태도와 애교를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일본 사회 분위기가 역설적으로 이런 캐릭터에 대한 환호를 불러왔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공수 모두 완벽한 실력에, 코트에선 '저세상 포스'로 동료들을 휘어잡는 김연경에게서 일본 여성들은 또 한 명의 히어로를 찾아낸 게 아닐까요?

한국 여자배구팀은 6일 밤 브라질과 4강전을 치릅니다. 이번엔 후지TV에서 생중계를 합니다. 트위터엔 이런 감상도 올라와있습니다. "혐한(嫌韓) 감정이 강했던 나조차도 김연경 덕에 혐한 감정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네요. 나같은 일본인이 늘어나는 느낌." 일본 내 뿌리깊은 혐한까지 스파이크로 뚫어버리는 김연경의 활약을 일본 팬들과 함께 응원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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